무채색의 위로 1
대학교 시절 내내 붙어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목청이 터져라 웃어댔고, 꼭 비슷한 때에 같은 것을 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신기하게 잘 통했고 그 덕에 4년을 넘게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냈다. 그런데 우리가 딱 하나 엇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음식이었다.
나는 주로 양식이나 빵 등을 선호하는 해외파였고 친구는 얼큰한 것을 좋아하는 이름난 한식파였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면 배려하느라 파스타도 먹고 김치찌개도 먹고 그랬지만 서로에게 완전히 다른 입맛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는 종종 나를 ‘불란서’에서 왔냐고 놀려댔다. 그러면 나는 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숙취로 고생하는 친구를 위해 나주곰탕을 먹으러 간 적이 있다.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던 나는 뚝배기에 담겨 나온 뜨거운 곰탕을 호호 불어대다가 숟가락을 놨다. 친구는 나와 달리 빠르게 그릇을 비웠고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뚝배기 국물은 왜 이렇게 안 식어? 못 먹겠어.”
그러자 친구가 놀라운 대답을 했다.
“언니, 그래서 뚝배기에 먹는 거야. 끝까지 식지 말라고.”
뚝배기는 오래도록 뜨겁게 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뚝배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누군가에겐 뚝배기를 고집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나를 짜증나게 하는 그것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늘 그랬다. 나는 루꼴라의 쌉싸름함을 좋아했는데 엄마는 루꼴라가 영 써서 못 먹겠다며 싫어했었다. 나는 쌀떡의 쫄깃함 때문에 떡볶이를 먹었는데 누군가는 떡볶이의 쌀떡은 말랑말랑하지 않다며 밀가루 떡만 고집했다. 무언가의 장점은 꼭 모두에게 장점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있어 뚝배기의 치명적인 단점이 친구에게는 완벽한 장점이었던 것처럼.
그 후에는 뚝배기에 담긴 국물을 먹지 않을 때도 계속 삶 속에서 그것을 배워갔다. 장점은 때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한다는 걸. 그러니 완전한 장점 혹은 완전한 단점은 절대 없으며, 어떤 단점을 바로 단점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는 걸. 사람들은 종종 이런 표현을 쓴다.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면 예민하다.’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다.’ 같은 성격이 어떨 때는 장점이 되고 어떨 때는 단점이 되는 것이다. 음식과 성격만 그럴까.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이 상황이 다른 시각으로 볼 때는 새로운 기회로 가득 찬 운명의 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걸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후에야 깨닫곤 한다.
그 친구와는 여전히 잘 지낸다. 그리고 친구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예전보다 늘어난 횟수로 뚝배기에 담긴 뜨거운 음식들에 도전하고 있다. 왜 그 친구가 즐겨먹는 음식은 이렇게 끝까지 뜨거워야 하는지 직접 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이전의 단점은 더 이상 단점이 아닐 것이다. 끝까지 내가 뚝배기의 매력을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단점이 누군가에게는 장점이라는 것을 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 인생은 한층 풍족해질 수 있다. 양면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뚝배기 덕에 인생이 아주 조금 더 재밌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