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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보아 Aug 14. 2020

행복 취재

필리핀 골목에서

필리핀 바기오에 있는 어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 날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치기 전까지 멍 하니 책상에 앉아 있다가 필리핀 영어 선생님을 맞았다. 듣기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이셨다. 점심시간 전에 잔뜩 굶주린 나를 위해 가끔 필리핀 과일이나 과자를 가져오시곤 했다.


그 분이 여느 때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다 선생님의 손에 오디오가 없는 것을 보고 곧 어리둥절했다. 선생님은 교실 문 앞에서 친구를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볼펜이랑 종이 들고 와. 나가자!

(Bring your pen and paper. Let's go!)”


그 목소리가 너무나 경쾌해서 선생님을 따라 학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서 공사를 하는 탓에 학교 앞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선생님께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이유를 여쭈었다. 마치 윙크를 하듯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 있던 선생님은, 밖에 있는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인터뷰를 하기 위해 나왔다고 하셨다. 주제는 ‘인생’이라는 설명과 함께.   

   

어려운 주제였다. 밖으로 나와 이 곳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 해보라는 선생님의 뜻은 감사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온 상태라 상당히 난처했다. 다시 어학원 안으로 들어가자며 선생님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선생님은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선생님을 따라 가 보니 어느 중년의 여성이 도로 옆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검고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여러 음식들이 있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안에 어떤 것들이 있나 보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나의 팔을 툭툭 쳤다. 대화를 할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다.      


음식을 팔고 계시는 분은, 얼굴에 주름이 많았지만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머리가 아직 검은 아주머니셨다. 선생님께서 필리핀 말로 먼저 양해를 구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싶어 서투른 영어로 나를 소개 했다. 아주머니께서는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움츠리셨다. 물건을 사러 온 줄 알았던 외국인이 ‘인터뷰’를 시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인생에 있어서의 행복이 무엇입니까?’란 질문을 던지자 아주머니께서는 더욱 난처해 하셨다. 내 옆에 계시던 선생님 향해 멋쩍게 웃으셨다.      


‘새카만 매연으로 가득한 도로 한쪽 옆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께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건가’ 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아주머니께서 대답을 망설이시자 더욱 기운이 빠져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선생님께서 필리핀어로 다시 무언가를 말씀하셨다. 그 덕분에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사하는 소리 탓에 아주머니의 말씀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Vendor’라는 단어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귀를 기울이는 나의 모습을 보시고 아주머니께서는 친절하게 다시 말씀해주셨다. 자신은 지금 이렇게 밖에 나와서 당신께서 만든 음식을 사람들에게 팔 수 있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음식을 샀다. 길을 건너 다른 인터뷰 대상을 찾아보았다.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포장을 뜯고 있는 남자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아직 영어를 하지 못 한다고 해서 오른 쪽으로 난 길로 들어갔다. 필리핀에서 생활한 지 네 달이 되어가는 시점이었지만 어학원 주변의 골목 깊숙이 들어와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있는 집들을 보다가 우리와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는 어느 남자를 보았다.     


이마가 훤한 남자였다. 어느 회사의 유니폼 같기도 하고 작업복 같기도 한 그의 옷차림을 보고 추측해 보았다. 그는 성실하게 일하는 가장이고 아내와 두세 명의 자녀가 있을 것이라고. 영어를 할 수 있냐고 선생님께서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를 공부하는 한국 대학생’이라고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그는 나에게도 푸근하고 선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간식을 팔던 아주머니처럼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열심히 생각하더니 어렵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나의 질문에 최대한 많은 것을 대답하려 노력했다. 그는 필리핀 최남단에서 왔다고 했다. 북쪽 지역인 이곳 바기오에서 일한 지 3개월이 된 상황이었다. 듣기 평가에 나오는 성우들의 또박 또박한 영어 발음에 길들여진 탓에 역시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조엘’이라는 그의 이름도 몇 번을 되물어보고 나서야 종이에 제대로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Insurance’와 ‘Collector’라는 단어를 듣고 그가 보험설계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바기오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중인데 차비를 들이지 않기 위해 걸어 다닌다고 했다. 아직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이고 싱글이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 했다. 자녀가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에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의 눈에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에게 더 인터뷰를 하고 싶은지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까지 걷기로 했다. 우리는 처음 만났던 아주머니로부터 산 음식을 꺼냈다. 비닐 랩을 벗기며 선생님께서 ‘Rice Cake’이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의 떡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해 하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찰떡처럼 쫀득쫀득, 달콤했다. 한 손으로는 떡을 쥐고 한 손으로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걷다가 조엘을 다시 만났다. 사실, 오래 서 있다 보면 어지럼증이 날 정도로 햇볕이 강한 이 도시 방방곡곡을 걸어 다닌다는 그에게 느끼는 연민이 컸었다. 하지만 다시 마주쳤을 때 그가 쓰고 있는 새파랗고 커다란 우산을 보고 걱정이 사라졌다. 우리를 알아보고 활짝 웃는 그를 보며, 동화 속 파랑새의 깃털이 그의 우산과 같은 빛깔이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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