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정리를 할 때마다 열어 보고서 그대로 닫아버리는 서랍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약을 보관한 서랍 칸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이 대부분인데 버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약은 그냥 쓰레기 봉지에 넣어서 버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약의 항생 물질이 토양, 하천 등으로 들어가면 지구 생태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따로 모아서 약국, 보건소 등에 갖다 줘야 한다. 이런 정보를 알고는 있지만 약을 정리하기가 무지 귀찮았다. 그냥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꾹 참으며 ‘다음에’, ‘다음에’ 하고 약이 보관된 서랍을 그냥 방치해 두었다.
살림살이가 점점 늘면서 수납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약 정리’라는 일을 미루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도 그냥 지나가면 평생 정리를 못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었다. 그 날 결국 약들을 모조리 꺼내 정리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 아직 놔두고 먹을 수 있는 약을 우선 분류했다. 대부분의 약이 유통기한이 몇 년은 지난 것들이었다.
버려야 하는 약들을 추린 후에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약을 포장재에서 일일이 꺼내는 데에 몇 십 분이 걸렸다. 봉지를 한 번 뜯기만 하면 내용물이 다 나오는 약도 있었지만, 플라스틱 안에 한 알 한 알이 따로 포장된 약이 훨씬 많았다. 알약이 튀어 나온 부분을 엄지로 톡톡 힘을 줘서 눌러 빼내는 일이 나름 재미는 있었다. 마치 뽁뽁이를 누를 때와 비슷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잘 빠져 나오는 알약을 꺼낼 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어린이 보호 포장 방식으로 싸여 있는 약들은, 작업하기가 까다로웠다. 껍질을 엄지와 검지 손톱 끝으로 까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겨우 껍질을 까고 나면 손톱 색깔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꾸욱 힘을 줘서 눌러야 알약을 꺼낼 수 있었다. 다 먹지도 못할 약을 산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귀찮은 작업이지만 약을 따로 모으는 과정에서 얻는 것도 있었다. 최근 몇 년 간 몸의 어디가 어떻게 문제였는지 돌이켜 볼 수 있었다. 인후통 약 상자가 여러 개 있고, 각 상자 안에는 약이 몇 알만 남아 있었다. 그걸 보면서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목이 붓고 쉰 소리가 났던 게 떠올랐다. 여드름 치료약을 보면서는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친한 친구 결혼식 전날, 갑자기 이마에 큰 여드름이 나서 속상해 하며 구입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시간 여행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비닐 팩에 색색의 약을 모아 담았다.
약국에 도착했다.
“저, 약 모아왔는데 버려주실 수 있나요?”라고 여쭤 보았다. 귀찮게 여기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히도 약사님은 “그럼요!”라며 흔쾌히 대답하셨다.
“여기요.”
약이 담긴 비닐 팩을 약국 계산대에 놓았다. 그것을 받아서 들여다 본 약사님은 화들짝 놀랐다.
“이걸 다 분리 해 오셨어요? 저희야 편하기는 한데, 약을 다 빼내느라 힘 드셨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약사님께, 괜찮다고 멋쩍게 웃었다. 나는 하루 날 잡고 약 포장을 뜯으면 된다. 포장을 뜯지 않고 그냥 가져다 드리면, 여러 집에서 약을 전달 받는 약사님은 포장재와 약을 분리하는 데에 얼마나 에너지를 많이 쓰시겠는가.
약사님은 약들을 다시 보더니, 짧은 순간에 여러 표정을 지으셨다. 인상을 찌푸렸다가 웃다가, 신기해 하는 얼굴을 하기도 했다. 내가 들인 노동력과 시간을 가늠하니 감탄이 나오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구급약 키트를 사서 약을 쟁여 놓지 않고 그때 그때 필요한 약을 사러 약국에 갈 것이다. 병원에서 처방 받는 약이 생기면 거르지 않고 꼭 다 먹고야 말 것이라는 의지도 다진다. 하지만 그래도 버려야 하는 약이 생겨서 쌓인다면, 그때도 약사님을 놀래켜 드리고 싶다. 알록달록 약을 모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