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니스초이 Mar 19. 2018

모든 것이 되고 싶다

[프롤로그] 꿈이 너무 많은 나에 대한 이야기

사진출처: https://www.proaudioland.com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두 달만에 체르니 30까지 진도가 나갈 만큼 재주가 있었다. 피아노 학원은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방들 중심에 모두가 볼 수 있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마치 무대같은 피아노에서 처음으로 선생님과 듀오로 피아노를 치던 날, 나는 너무 즐거웠고 뿌듯했었다. 얼마 후, 선생님의 추천으로 콩쿠르를 준비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곡을 정해 배우기 시작했을 때 엄마가 피아노 학원을 끊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여러 차례 집에까지 찾아오셔서 엄마를 설득하고자 하셨지만, 나는 결국 피아노 학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최근에 엄마와 얘기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당시 엄마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 동생의 분유값을 위해 나의 피아노 학원을 끊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세명의 아이에게 한 번에 뭔가를 해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때를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또래에 비해 조숙한 장녀였던 나는 부모님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이미 체득한 것이었고, 일종의 삶의 진리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여서 자라는 내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친구들이 다 다니는 영어학원도 다니고 싶었고, 피아노가 안된다면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고, 검도를 하고 싶었고, 무용을 배우고 싶었다. 문학전집을 사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아주 가끔 시내의 서점에 가서 가장 읽고 싶은 책 1권을 골라오라고 하셨는데 그럴 때는 이집트 고고학에 대한 책을 골라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꿈의 근원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집트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 세명을 키우는, 성실하지만 그렇게 많은 재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젊은 부부에게 나라는 첫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해달라는 것을 충분히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아이를 낳을 나이가 된 지금에서는 이해가 간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재능을 가진 내가 되었음에 감사한다. 그렇지만, 늘 안된다는 소리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해본 적이 없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그 또한 마음이 아프다. 아이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꿈과 자신감과 격려 속에서 자라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내 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있다. 


이제 와서 고고학자의 길을 가긴 어렵지만, 여전히 이집트에 가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탐험하고 싶은 내가 있다. 콩쿠르를 나갈 순 없지만, 쇼팽을 연주하고 싶은 내가 아니, 하다못해 교회의 서브 반주자라도 되고 싶은 내가 있다. 성인이 되어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손가락에 쥐가 나서 그만뒀지만, 차선책으로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우쿨렐레를 연습하는 내가 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영어를 배웠고, 유학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해외영업 담당자로 전 세계 거래선들을 상대하고, 틈틈이 책을 번역하고 있는 내가 있다. 아침마다 중국어 한 구절을 따라 하고, 스페인어 책을 사서 동사를 외우고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를 배워서 각종 책들과 성경을 원서로 읽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스포츠는 없지만, 체육관에 가서 팔 굽혀 펴기와 스퀏을 하며 운동을 하는 내가 있다. 그림책을 사랑하고,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고 싶은 내가 있다. 사고 싶은 책이 잔뜩 있는 내가 있다. 발레학원을 알아보고 있는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세우고, 리스트를 작성한다. 


올해는 독학한 우쿨렐레의 정식 강좌를 수강해서 실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중국어 발음을 마스터하고, 글쓰기 강좌를 듣고, 독서심리지도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다. 저녁엔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치앙마이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성경을 1 독하고, 책을 100권 읽는다. 회사 매출은 전년대비 20%를 끌어올리고, 그를 위한 방편 중 하나로 해외 온라인 마켓에 입점하고 광고를 한다. 상반기 동안에는 첫 번째 번역 출간서의 오류를 교정해서 개정판을 준비한다. 


어린 시절 나의 삶을 지배했던 진리는 거짓이었다. 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열심히 일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다(하다못해 인기 없는 책이라도 번역을 해서 내 이름이 들어간 책을 낼 수 있다: 내가 우연한 기회에 실제로 두 번이나 해낸 일! 야호!). 여러 외국어를 구사해 원하는 책을 원서로 읽을 수도 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강의하는 강사도 될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상담심리 지식을 이용해 나 자신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줄 수도 있다. 그림책을 쓸 수도 있지만, 좋은 그림책을 번역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치유할 수 있다. 그 아이가 실컷 놀게 해 주고, 실컷 배우게 해 주고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해내게 될 때마다 격려하고 손뼉 쳐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이 되고 싶은 나를 치유해가며 성장해가는 이야기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