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을 앞두고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삶을 가꾸는 글쓰기’다. 교사가 된 이후로는 줄곧 아이들과 글쓰기를 해왔다. 저 경력 교사 시절에는 일기를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기 검사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이 있고부터는 글감을 던져주고 그에 대한 글을 쓰게 했다. '삶쓰기'의 시작이다.
삶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에서 따왔다. 아이들이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정직하게 쓰는 것,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고 누리는 것이 핵심이다. 몇 년간 삶쓰기를 통해 아이들과 글로 소통했지만, 학교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이 있다는 핑계로 삶쓰기를 깊이 있고 진지하게 다루지는 못했다.
삶쓰기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도 있다. 2010년대 초반 스마트교육이 등장하고 ‘21세기 핵심 역량(21st century skills)’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면서다.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핵심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읽고, 쓰고, 셈하기 같은 전통적인 방식의 교육보다는 창의성(Creativity),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on), 협업능력(Collaboration), 비판적 사고력(Critical thinking)등 흔히 4C로 일컬어지는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목적>에서 단편적인 지식은 교양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박식에 그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암기 과목을 싫어했다. 이걸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단어들을 외우고 시험을 보며 토해냈다. 과음한 다음 날의 숙취처럼 하루 이틀 지나면 암기한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암기하는 교육이 아니라 역량을 강조하는 교육은 그래서 더 매혹적이었다.
컴퓨터나 스마트기기는 익숙했기 때문에 교육 활동에 웹 서비스, 아이패드, 크롬북 같은 도구를 적절히 활용했다. 직접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보다는 모둠 활동, 상호 평가, 프로젝트 학습을 선호했다.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교사만 떠들고 있는 지루한 수업이 아니었고 새로운 교육 방법과 도구가 주는 호기심 때문에 더 열심히 참여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핵심 역량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역량의 측정과 평가는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면 됐지 뭐.’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려되는 점도 있었다. ‘역량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것은 교육을 너무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미래 핵심 역량을 보면 IT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서비스나 제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개발한다. 이 과정에서 창의성, 비판적 사고력, 의사소통, 협업이 필요하다. 요즘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재택근무를 할 때는 더욱 고도화된 역량이 필요하다.
이렇게 역량을 강조하는 교육은 ‘배우는 것의 즐거움’ 그 자체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기르는 것에 가깝다. 교육에 경제 논리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 사회로 배출하고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 이렇게 해서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을 도구적으로 접근한다’는 그 느낌이 나를 계속 불편하게 한다.
초등교육은 ‘기초•기본 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기초이고 기본일까?’가 내가 계속 고민하는 지점이다. 글쓰기는 언어 활동의 기본이고 언어는 사고력의 기초가 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도 없다. 무엇보다 삶쓰기에 무게를 두고 싶은 이유다.
최근 글쓰기와 관련된 책 두 권을 읽었다. 하나는 김신회의 <심심과 열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이다. 두 작가의 공통점 중 하나는 초등학생 시절 자신의 글에 관심을 보이고 칭찬해준 선생님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외모가 특출난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닌 김신회 작가에게는 ‘너는 글을 쓰게 될 거야. 너는 작가가 될 거야’라고 말해주는 선생님이 계셨다. 이슬아 작가에게는 자신이 쓴 일기보다 더 긴 댓글을 남겨주는, 음성이 아닌 텍스트로 말을 걸어준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호기심이 주는 무게감을 느끼면서도 삶쓰기를 통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지런한 사랑>에는 아이들의 글이 많이 실려있다. 책을 읽다 보니 휴직 전 삶쓰기 공책을 읽으며 즐거워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기발함에 놀라 연신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는 했다.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아이들과 글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교사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자 특권이다. 아이들이 써 내려간 삶에서 나도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나도, 아이들도 삶을 가꾸는 글을 계속 쓸 것이다. 쓰는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릴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어린 예술가를 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