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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Aug 02. 2023

작가들이 수준 낮은 작품도 읽어야 하는 이유

망한 영화 주간

망한 영화들만 모아서 '왜 망했나' 분석해 보는 주간.


예전에. 총각 시절 가졌던 연례 행사다. 주로 여름에 많이 했는데, 일주일 동안 지난해 망했던 영화들만 모아서 봤다. 반려자는 뭐 그딴 악취미가 다 있냐 하는데, 왜? 뭐? 이게 어디가 어때서?


망한 영화 감상법

망한 영화를 그냥 보면 당연히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그런데 분석하는 자세로 임하면 일주일씩 여러 작품을 몰아서 봐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

영화감독은 아니지만 나는 망한 영화가 대체 왜 망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지금은 뭐 봤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애초에 그래서 망했겠지?), 주로 소설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을 많이 봤더랬다.

(교훈 =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망하기 십상이다.)

망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ㅡ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에 국한하자면, 애초에 텍스트로만 존재했어야 할 작품을 영화로 옮겨서다. 이를테면 글맛이 살아있는, 스토리는 평범한데 작가의 말맛이 참 일품인 그런 작품들 말이다. 아니, 글맛이 좋으면 그냥 글로만 읽으면 되는데 그걸 왜 굳이! 억지로! 영상으로 바꾸나. 그러니까 망하지. 스토리가 참신하고 재밌으면 몰라, 글맛으로 읽는 작품은 영화화하기엔 글쎄.


일반 관객들, 독자들이야 재밌는 작품만 찾아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그 분야 종사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감독, 작가 말이다.

오히려 망한 작품을 더 열심히 찾아봐야 한다.


예술가들이여, 망한 작품도 많이 봐야 한다!


<브이 포 벤데타>, <워치맨>, <배트맨: 킬링 조크>, <젠틀맨 리그>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미국 코믹스계의 전설인 앨런 무어 Alan Moore도 나와 비슷한 취미가 있더라. 반가웠다. 그는 '졸작이 명작보다 더 많은 영감을 준다'라며, '작가들은 망한 작품을 많이 읽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망한 작품을 보면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와, ㅅㅂ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싶은 것이다. 자위 아니냐 싶겠지만 초보 작가들에겐 이런 안도감이나 우월감도 한번씩 필요하다.

글이 안 써지는 90%의 원인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인데, 생각처럼 이완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과정에서도 어깨에 힘을 빼기 위한 훈련이 많다.

글의 구조를 익히고, 퇴고 방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초심자에게는 모니터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 훈련이 먼저다.

그런데, 망한 작품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잘해야지, 잘해야지'만 하다가 망작을 보면 '이 정도는 나도 하겠네' 싶어진다. 그 자신감이 가장 무거운 첫줄을 밀고 나가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둘째, 망한 지점을 분석하면서 실력이 는다. 대체 왜 망했는지, 특히 나는 어느 지점이 최악이라 여겨지는지를 찾는다. '얘는 도대체 이 부분을 왜 이렇게 썼지?'하는 바로 그 지점을 분석하면 된다.

앨런 무어는 작가의 실수를 분석하면서 '스타일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데, 글쎄. '스타일 개선'이라기엔 막연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준다. 쓸데없이 서사가 길다든지, 긴장감을 고조시켜야 하는 부분에서 텐션(tension)이 늘어진다든지 하는. 작가가 저지를 만한 실수가 수백 가지는 되니 문제긴 한데,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지'하는 오답 노트 작성은 성적 향상에 도움을 준다.

아마추어가 아마추어에게

학창시절(문예창작학과 재학 당시) 이성복 선생님께서는 기성 작가의 시 한 편을 놓고 중간이나 마지막 연을 지우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관점에서 써보도록 시키셨다. 어렵다. 어려운데, 시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고 한줄 한줄이 하는 역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시 창작에 이만한 훈련이 또 있을까 싶다.

나도 이 방법을 응용해서 쓰고 있다. 글쓰기 교육을 하면서, 과정을 어느 정도 진행한 분들 대상으로 첨삭 훈련을 시킨다. 타인의 글을 직접 수정해 보도록 하는데, 본인도 어제까지 첨삭을 받던 입장이라 처음엔 다들 쭈뼛쭈뼛하신다. 그런데, 이 과정에 성실히 임한 분들은 글쓰기 실력이 정말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나도 놀랄 정도로.

'내 글'에선 보이지 않던 실수가 '남의 글'을 통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 나는 이런 실수하지 말아야지'하고 각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자기보단 남의 문제가 더 잘 보인다. 근데 남의 흠을 보면서 배우는 점이 분명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남의 글 첨삭하는 재미가 있다. 나는 일찍이 그 재미를 알아서 업으로 삼은 사람이고. 글쓰기 훈련할 때 남의 글 놓고 '나라면 이렇게 썼겠다'하면서 직접 수정해보면 글 쓰기에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도움도 되고.




브런치 구독자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책이 나온 이후 어쩐지 브런치에 소홀해져버렸네요.

간간히 글을 통해 안부 전하겠습니다. 더운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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