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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my Dec 06. 2019

마냥 쉽지는 않았다

떠나기로 마음먹다



아기가 생겼다. 결혼 9년 차, 드디어 우리 부부에게 아기가 생겼다. 두 번의 유산과 병원 치료 끝에 겨우 얻은 아기였다. 그리고 아기가 점점 생명체로 자라날수록 반대로 나의 직장생활은 점점 숨을 멎어갔다.


가장 슬픈 건 육아휴직을 지원해주지 못하는 회사 사정이었다. 5년 동안 내 유산에 같이 슬퍼해주고 매주 멀리 병원에 다녀야 하는 내 사정을 먼저 이해해줬던 회사였다. 미혼자보다 책임감도 크고 오래 다닌다며 기혼자인 나를 뽑아줬던 복지 좋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외국계 회사였지만 여기가 한계였다.


회사 안의 많은 엄마들도 다 3개월 된 아기를 엄마나, 어머님께 맡기고 회사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엄마나 어머님도 없었다. 나의 임신을 축하하며 아기 맡길 곳을 물어보시던 상사. 3개월 된 애를 남 손에 맡기고 싶진 않았다. 여기까지였다.



남편은 일 욕심 많은 IT 개발자다. 일 욕심 없어도 야근하는 판에 욕심까지 많으니 집에 못 들어오는 일만 골라하는 기분이다. 최신 기술을 쫓으며 밤낮없이 일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영어였다. 코드 구글링 정도는 그간 10년 넘게 해온 눈칫밥으로도 끄떡없었지만 본사에서 온 외국인과의 회의에 무너졌다.


남편은 영어를 안 했다. 대학원까지 다녔지만 영어 못해도 졸업시켜주더라. 그런데 드디어 벽에 부딪친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앞으로 더 나아가려면 영어를 해야 했고, 우린 빠른 방법을 택했다. 남편은 자기가 쉬는 동안에도 빠르게 바뀌어 갈 IT업계에서 감을 잃을까 봐 걱정했다. 먹여 살릴 핏덩이가 있는데 집 나간 감 찾는 게 일이겠냐, 가 내 의견이었다.



아기와 함께 할 시간도 절실했다. 나는 매주 병원에서 초음파를 보고 매일 배에 주사를 맞아야 했다. 처음 내가 내 배에 주사를 놓아야 했던 날, 전화기 너머 무섭다고 울먹이던 내 목소리에 남편도 나만큼이나 울었겠지. 밤 12시 전에 퇴근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힘들던지.



그리고 우리의 해외 살아보기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빽빽한 서울이 지겨워 떠난 것이니 그곳은 탁 트인 곳이었으면 했다. 영어를 쓰고 내가 일도 할 수 있는 곳. 내 정보력으론 영어 수업을 듣는 학생의 배우자가 일을 할 수 있는 나라는 호주가 유일했다. 그래서 호주로 갔다.


이왕 호주로 가는 거 내 동생이 사는 시드니로 가기로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건방졌다. 동생에게 너 있는 곳으로 가도 되겠니 사정해야 할 입장이었다. 동생이 없었다면 우리 부부는 일 년 내내 아기랑 울고만 있다 왔을 판이었다.


유학원 몇 군데에 상담을 받고, 학교를 정하고, 비자를 받았다. 그 사이 아기가 태어났고, 아기가 6개월 되고, 며칠 후 우리 가족은 시드니로 떠났다.



6개월 아기와 떠난 우리 가족 호주 일 년 살기 이야기


프롤로그

Part1. 준비단계

- 마냥 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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