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학교 예술수업
주 1회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극단에 들어가거나 영화촬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고, 박 감독의 디렉션으로 연기하고 있다. 박 감독은 내가 방과후 교사로 나가는 특수학교의 3학년 학생이다.
박 감독 반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실무원 선생님은 '박 감독 때문에 미치겠어요' 했다. 박 감독이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서서 말하는데,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쏼라쏼라 하는데 약올라 죽겠다는 것이다. 같은 영상을 얼마나 많이 틀어봤던건지 발음이 원어민에 버금갈 정도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어떤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였다. "Don't miss that train." "Please take a seat." 역할에 따라 목소리 톤도 바꾸고, 자리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꿔가며 1인 다역으로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다가가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모노 드라마의 대가였다.
자기만의 세상 속에 행복해보였지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야하기에 산통을 깼다. 피아노를 들고 쫓아가보기도 하고, 우쿨렐레를 억지로 둘러주기도 했다. 그러나 박 감독은 자기의 작품 외에는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가까이 가면 도망가버리기 일쑤였다. 혼자 노래하는 것보면 발성도 참 좋고, 친해지면 악기 연주하며 끼를 펼칠 수 있을텐데. 박 감독이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니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어수선해졌다.
작년에 박 감독을 맡았던 선생님께 "수업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박 감독은 뭘 해야 좋아해요?"물었다. 선생님은 "그 친구는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예술적인 감성이 엄청 뛰어나요. 오페라의 유령 ost 틀어주면 혼자 노래도 부를거에요. 작년에 제가 계속 들려줬더니 그새 가사를 다 외웠더라고요."했다.
다음 수업 시간에 모른척 오페라의 유령 ost의 메인 트랙인 Phantom of the opera 를 틀었다. 박 감독은 놀란 기색도 없이 내 손을 끌고 거울 앞으로 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첫 역할을 주었다. 여주인공 크리스틴 역이었다. 박 감독은 연출과 주인공 에릭 역이다. 에릭이 노래할 때는 본인이 부르고, 크리스틴 부분엔 입을 다물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내 목 울대를 눌러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잘 모르는 가사이지만 감독의 열정에 부합하기 위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열창했다. 우리 둘은 손을 맞잡고 거울을 바라보며 안무까지 만들었다. 박 감독은 유연한 사람이라 내가 제안한 안무도 잘 채택해주었다. 그렇게 몇 주간 크리스틴으로 지냈다.
박 감독의 신작이 나왔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이다. 한국어 버전 '작은별'도 대중적이긴 하지만 박 감독은 영어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영어버전으로 무대에 오른다. 박 감독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칠판 가득 그림을 그렸다. 이 노래에 담긴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사이즈 그림은 그리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남색 바탕에 노란 별, 외곽은 분홍색으로 장식했다. 박 감독이 이 노래를 바라보는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른 친구들도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칠판을 어슬렁거리며 구경했다. 장난끼 많은 친구가 완성작에 붓으로 다른 칠을 해서 훼손되었지만 박 감독은 연연하지 않고 거울 앞으로 갔다.
찝쩍거리면 새 배역이 주어질까 싶어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박 감독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우쿨렐레만 연주하게 하더니 조금 있다가 내 목 울대를 또 눌렀다. 그렇게 간택받은 나는 이번엔 연주와 노래를 맡았고, 박 감독은 립싱크를 하며 연기했다. 나는 무대미술에 방해가 되니 거울에 걸리지 않는 자리에서 노래해야 한다. 이번에는 뒤에서 앞으로 걸어오거나 부드러운 손 동작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다음 번엔 어떤 작품이 주어질까. 박 감독 덕분에 예술의 아름다움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