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을 보아서 눈에 익은 사진 때문에, 어떤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른 새벽, 통증 때문에 깼을 때 그 사진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젊고 머리 긴 엄마와 보이스카웃 옷을 입고 책가방을 메고 있던 동생과 나. 하교 길이었고, 우리가 ‘작은 놀이터’라고 부르던 아파트 단지 안의 놀이터에서 엄마는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주셨다.
특별한 날이어야만 카메라에 새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카메라에 남아 있던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굳이 그 날 하교길의 나와 동생의 모습을 찍으셨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서른 여섯이었다. 너무 젊은데, 엄마라는 단어의 무게 때문일까 그저 온화함만이 엄마의 얼굴에 배어있다. (사진을 다시 보니 포커스가 제대로 맞지도 않았다.) 엄마가 했던 화장, 입고 있는 티셔츠와 바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모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버린 시간이 문득 서글퍼졌다. 그 때 이후 삼십년이나 지나버렸다는 사실이. 하루의 시간은 체감할 수 있지만, 십년 너머의 기억들은 내 몸을 통과했어도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새까맣던 소년 둘은 어느 덧 그 때의 자신들만한 아이가 있는 어른이 되었다. 황현산 선생님 말씀처럼 ‘준비만 하다가’
며칠의 통증으로 약해진 컨디션 때문일까. 마음마저 약해진 건지 이유모를 그리움에 눈앞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