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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un May 14. 2023

우울한 날에는 도삭면 칼제비죠.

네덜란드 하루 한 끼 (1) 

한동안 봄기운을 내뿜던 네덜란드 날씨가 다시 본색을 드러냈다. 네덜란드 날씨는 밀당의 귀재다. 어제까지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찌푸린 얼굴에서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를 방울방울 떨궈낸다. 그리고 그 징징거림은 한없이 길고, 길다. 뚝 그치라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게. 

한국에 있을 때는 좋지 않은 날씨를 핑계 삼아 따뜻한 방바닥을 뒹굴면서 푹 쉬고는 했었는데.. 네덜란드에서 날씨를 핑계 삼아 방구석에 뻗쳐있다가는 순식간에 하루종일 침대생활을 해야만 하는 환자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좋은 점이 있다면 덕분에 날씨에 대한 불평이 줄었다는 것. 아니, 없어졌다고 봐야 맞다. 

이젠 더 이상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도 우산을 꺼내 들기 위해 분주하지 않다. '그러려니'하는 관대함을 한 번 발휘한 다음, 어차피 젖은 옷, 집에 가서 빨리 말려야겠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을 할 뿐이다. '아, 왜 갑자기 비가 내리고 난리야. 아무튼 이놈의 네덜란드 날씨란..(구시렁구시렁)'하는 대신,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마인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산성비면 어떻고, 알칼리성비인들 뭐 어떤가. 맞고 죽지 않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비가 내리는 하루를 꿋꿋하게 살아내고 집으로 오면,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방바닥에 축 늘어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때가 대부분이다.  사실 이 순간이 혼자 외국에서 살면서 가장 서러운 순간이다. 엄마가 부쳐주는 김치전도 먹고 싶고, 동네에 있던 6000원짜리 수제비집도 그립다.(지금은 가격이 더 올랐겠지..) 한국에서는 손만 뻗으면 닿았던 것들이 여기서는 구하기에 난이도가 꽤나 높은 것들이 된다. 김치전이라고 한 장 부치려면 일단 김치부터 만들어야 한다. 배추부터 사서, 씻어, 손질해서 소금에 절여야 한다. 그뿐인가. 제대로 된 수제비나 칼국수가 먹고 싶다면 밀가루를 치대고, 육수를 내야 할 것이다. 


이것저것 머릿속으로 과정을 상상하다 보면, 머릿속에 '됐다 마 치아라'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떻게 하면 가장 간단하게 한국에서 먹던 맛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가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다. 


자, 덕분에 느는 것은 요령뿐이다. 그래도 나는 주변 자취생들 중에서도 꽤나 음식을 잘해 먹는 편에 속한다 자부한다.(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자, 일단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동네 마트로 향한다. 


장을 봐서 집에 오니 뭔가 해 먹을 거라는 기대감에 요리할 기운이 조금 생겼다. 

김치 대신 동네 마트에서 구한 사우어 크라우트에 물을 꽉 짠 다음 고춧가루와 액젓 약간, 그리고 참기름에 버무려 신김치를 대신한다. 사우어 크라우트의 시큼 새콤한 맛이 양념과 어우러지면 김치에 대한 섭섭함이 그럭저럭 하게 달래지기는 할 것이다. 

밀가루를 치대거나 비싼 냉동 칼국수 면을 사용하는 대신 저렴한 중국면을 사용하면 일단 반죽에 대한 부담감은 많이 떨어진다. 나는 주로 중국 도삭면을 사용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중간중간 쫄깃한 식감 덕분에 칼국수와 수제비에 대한 향수를 동시에 달래기에 좋다. 

육수는 보통 아시아 마트에서 구한 새우스톡을 사용하거나 한국에서 가져온 사골육수 스톡을 사용한다. 그나마도 다 떨어지면 그냥 맹물에 굴소스와 액젓만 휘휘 둘러도 그럭저럭 원하는 맛은 난다. 오늘은 에너지가 조금 떨어진 것 같으니, 아끼고 아낀 사골육수 스톡을 투하한다. 

제일 귀찮은 부분은 야채를 썰어 넣는 일인데, 이때 아니면 자취생이 언제 야채를 소비하겠는가. 냉장고를 탈탈 털어서 있는 야채, 없는 야채를 다 도마 위에 꺼내놓는다. 살짝 곰팡이가 올랑올랑한 양파를 그 부분만 살짝 도려내 썰어서 육수에 투하한다. 비타민 섭취용으로 사다 놓고 바싹 미라가 되어가는 당근도 쫑쫑 썰어 넣고, 냉동실에 잠들어있던 대파도 꺼내어 전량 투하한다. 

마늘은 깔 수 있는 만큼 넣는다. 마늘 까는 데 재미가 붙는 날이면 한통도 넣고, 귀찮은 날은 두 세알정도라도 대충 다져 넣는다. 드디어 육수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미리 삶아 물기를 뺀 도삭면을 국물에 전부 투하한다. 국물은 한 번 끓일 때 많이 끓여놓으면, 2~3일간은 반찬 걱정을 덜 수 있다. 면을 또 넣고 칼국수를 한 번 더 해 먹어도 좋고, 면이 지겨우면 찬 밥을 넣어 죽을 끓여도 맛있다. 그러니 한 솥 가득 끓인다. 


드디어 완성이다. 맛은 솔직히 들인 노력과 수고에 비해 소박한 맛이다. 한국에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소비자로서 들이는 수고와, 외국에서 생산자로써 들이는 수고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당연한 결과지만, 사골육수 스톡이 내 몸과 마음에 전달하는 에너지는 그 이상이다. 그래도 이 만큼 시도를 하고, 결과를 냈음에 그저 흡족한 마음이다. 소박한 맛이지만, 나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긴 애정 넘치는 한 그릇이다. 야무지게 한 사발 들고나니, 드디어 온몸에 온기가 도는 기분이다. 그렇게 오늘도 잘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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