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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지몽 Jan 23. 2024

내아들과 첫 바나나우유

" 날씨도 흐리고 추운데, 우리 어디가지?"


주말은 어린아이와 사는 부모에게는 참 고민스러운 시간입니다. 미세먼지도 없고 따뜻하고 햇빛이 따사로운 날이면 공원이든, 한강변이든, 산이든 어디로든 가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지만, 오늘같이 눈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은 아이를 집에만 있게 해야 하지요. 에너지를 방출하지 못한 아이의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결국은 부모의 몫이라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 키즈카페는 어제 갔기도 했고, 요새 독감이 유행이라 자주가면 안좋잖아?"


그럼 키즈카페를 한번 더 갈까? 라고 말하려던 저의 입모양을 보고 아내가 선수치면서 내 입을 막아버리네요. 흠... 또다시 고민에 빠집니다. 아이는 벌써부터 뭐하고 놀꺼냐고 제 다리에 매달려서 칭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땅이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 그럼 찜질방은 어때?"


아내도 최근에 온몸이 쑤신다고 밤마다 끙끙거리고, 저도 매일 아침 운동을 하는 탓에 근육이 뭉쳐있었습니다. 아이는 찜질방 안에 있는 놀이방에서 신나게 놀면 되고, 아이와 번갈아가면서 놀아주면서 뜨끈한 찜질방에서 몸을 지질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찜질방으로 향했지요.


티켓을 구매하고 남자 여자 탈의실로 나뉘어 들어가는 길, 자연스럽게 혼자 룰루랄라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저의 어깨를 아내가 붙잡습니다. 


"자네! 어디를 가는가?"


아이가 이제 5살이라서, 엄마와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의 짐을 넘겨 받고 탈의실로 향했다. 아이와 찜질방은 딱 한번 가본적이 있지만, 아이와 함께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라서, 갑자기 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제대로 케어하지 못하면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옷을 벗고, 찜질방 옷으로 갈아입고, 아내와 다시 찜질방에서 만났습니다. 우리의 계획대로 아이는 신나게 놀이방에서 놀고, 아내와 저는 숯가마에서 땀을 흠뻑 뺐습니다. 컵라면이랑 식혜도 맛있게 먹고요. 오랜만에 TV도 좀 보고 싶고 누워있고 싶었지만, 아이는 이미 놀이방이 질린것 같습니다. 우리는 할수 없이 집에 가기로 합니다.


다시 남자 사우나로 내려온 아들과 저는 땀이 잔뜩 묻은 찜질복을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 아이가 미끌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이는 신기한듯 주변을 둘러보면서 함박 웃음을 짓네요.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다가, 제 마음이 조금 이상해 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아이와 처음으로 목욕탕에 온 것이더라구요. 나는 언제 우리 아버지와 목욕탕에 왔었지? 아버지와 목욕탕에 오면 참 좋은 기억이 많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뜻한 탕에 같이 들어가기도 하고 아버지가 때도 밀어주시고,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올때는 아버지는 칡즙, 저는 바나나우유를 사 마시고는 했지요.


그뒤로 수십년이 지나고, 이제 제가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들어왔습니다. 아이는 뜨거운 탕에 들어가자 '어~' 하는 소리를 냅니다. 아마도 옆에 있는 아저씨를 흉내내는 것 같네요. 아이가 싱글벙글하며 좋아하자, 탕에 같이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다른 아저씨들도 아이를 보고 웃음짓습니다.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기도 하시구요.


예전에 저희 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저도 아이와 냉탕온탕을 오가며 한참을 즐기다가, 비누로 몸을 씻고 밖에 나왔습니다. 신기하게도, 집에서는 옷을 한번 입히려면 이리 도망가고 저리 도망가던 녀석이 목욕탕에서는 어찌나 착하던지요. 금새 아이의 옷을 입히고, 저도 옷을 입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저와 목욕탕에 오는게 즐거우셨을까요? 제가 이렇게 기분이 좋고 행복한 것을 보니 그러셨을것 같습니다.


" 현아~ 아빠가 음료수 사줄께. 어떤거 먹을래?"


내심 바나나우유 바나나우유 를 외쳤지만 아이는 캔에 들어 있는 초코우유를 골랐습니다. 아직 5살 아이라서 카페인이 걱정스러워서 그건 안된다고 말해주자,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가 바나나우유를 고릅니다.


" 이거 마실꺼야 정말? 아빠가 예전에 이거 만드는 회사에 오래 다녔거든"

" 정말? 아빠 그럼 이거 매일 마셨어?"

" 아니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마셨지. 예전에 아빠가 할아버지랑 목욕탕에 왔을때도 이거 마셨어"

" 그래? 그러면 되게 오래된거네 "


그렇게, 아이와 저는 바나나 우유 세개를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내는 바나나우유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빨대를 꽂아 하나를 건냈습니다. 오늘은 우리 아들과 처음 목욕탕에 함께 들어간 날이고, 제 어린 시절처럼 처음으로 바나나 우유를 함께 마신 날이니까요.


제가 목욕탕에서 아버지와 함께한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저희 아이도 오늘을 기억할까요?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사는 많은 부자지간 사이에 흔한 이야기겠지만, 바나나우유, 아니 정확하게는 바나나맛우유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던 제 입장에서는 보통의 사람보다 조금 더 크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이와는 다음에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번에 찜질방에 갈때는, 할아버지랑 삼촌과 함께 가자구요. 3대가 함께 가는 목욕탕과 함께 나누어 먹는 특별한 바나나맛우유 를 기대하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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