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不知命, 無以爲君子也(불지명, 무이위군자야)” 《논어∙요왈》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 무게가 있다면 단연코 운명이라는 단어일 겁니다. 과거 신분제 사회나 봉건사회에서는 어느 곳, 어느 집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고 평생 그 ‘운명’대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부모가 가난한 집이면 가난하게, 부모가 노예이면 자식도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게 운명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평생 굴레에 갇혀 사는 삶이다보니 ‘운명’은 무게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직접적으로 ‘천명(天命)’이 두 번 언급이 되는데, <요왈편>에서는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군자는 무엇보다도 “천명(天命)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논어》는 ‘배움(學)’으로 시작해서 ‘명(命)’으로 마친다는 말처럼, 군자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배움’을, 그리고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이 준 ‘천명’, 즉 ‘운명’을 알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계씨편>에서 군자는 ‘천명’과 더불어 세 가지를 경외할 것을 말합니다. “군자는 경외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천명을 경외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경외하고, 성인의 말을 경외한다. 소인은 천명을 모르며, 성인의 말을 업신여긴다.” 우리 시대에서 ‘천명’을 종종 ‘운명’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체로 ‘운명’을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불가항력인 어떤 힘”으로 생각합니다.
“옛날에 인디언 용사가 있었다. 그 인디언 용사가 하루는 길을 가다가 독수리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둥지에서 떨어진 모양이었습니다. 다행히 깨지거나 상한 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라고 하는 새는 절벽 위나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인디언 용사는 그 알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길에 버리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인디언 용사는 고민했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독수리 알을 집으로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닭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얼마 후 그 독수리 알이 부화했습니다. 그런데 부화 한 독수리 새끼는 주위에 병아리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이 병아리인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다른 병아리처럼 모이를 쪼아 먹고 푸드덕 푸드덕 몇 미터밖에 날지 못하는 닭독수리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닭독수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 먼 창공에 너무나 멋진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독수리였습니다.
닭독수리는 부러운듯 이렇게 말합니다,
“와~ 멋지다. 나도 저 새처럼 날 수 있을까?”
그러자 옆에 있던 닭들이 비웃으며 말합니다.
“네 깐 녀석이 새 중의 왕인 독수리처럼 난다고? 아예 꿈도 꾸지 마라.”
닭독수리는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닭독수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닭독수리는 평생을 날지 못하는 새가 되어 평범한 닭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 인디언 우화 중에서
‘닭독수리’는 원래 독수리입니다. 다만 그가 부화하여 병아리들과 함께 자라다 보니 자신을 독수리가 아닌 닭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여기 닭독수리처럼 원래 자신은 독수리임에도 불구하고 닭이 자신의 운명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자(孔子)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바오펑산은 자신의 저서인 《공자전》에서 ‘운명’은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먼저 객관적인 측면으로, “사람과 자연의 관계, 사람과 사회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의 명운 등”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힘을 말합니다. 객관적인 측면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구의 태어나고 어느 나라에서 살게 된 것은 모두 천명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천명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마치 바위에 끼어서 평생을 살아가는 바닷가재와 같은 신세입니다. 바닷가재들은 주로 바다 깊은 바위에 나 있는 구멍이나 구석진 곳에 숨어 지냅니다. 그런데 그중 일부 가재들은 바위틈이나 무언가에 끼여서 꼼짝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죽지는 않지만, 행동에 제한이 되어 먹이를 잡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바닷가재들은 먹이 사냥은 독특한 방법이 사용하는데, 우선 커다란 집게발로 바닷물을 휘저은 다음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휩쓸려온 먹잇감을 잡아 입에 넣습니다. 하지만 이 바닷가재들은 바위에 끼인 채 말 그대로 평생 바위와 함께 자라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되는데, 이 바닷가재의 운명은 바위에 끼어 살고 어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운명의 주관적인 측면입니다. 우리가 그 운명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측면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 운명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서 삶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는데 이를 주관적인 측면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향한 태도와 그에 책임을 지는 삶을 말합니다. 유태인으로 태어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는 나치스의 탄압과 박해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임신한 아내와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까지 모든 가족을 잃고 자신만 살아남았는데,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 그리고 자신만의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후의 자유다.” 빅터 프랭클의 운명은 유태인으로 태어나서 나치의 핍박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볼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운명은 ‘소명(召命)’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말 그대로 ‘지명知命’, ‘명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명은 운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와 역할과 가치인 소명이기도 합니다. ‘소명’은 우리 삶의 외면인 직업이나 성공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삶의 내면에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한 소명은 성공한 삶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는데, 소명은 ‘성공’에서 ‘의미’로 인생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킬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삶의 방식을 견딜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니체는 정해진 ‘삶의 방식’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유’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일깨워줍니다.
‘지명知命’, 소명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다’의 의미를 단지 어떤 것을 ‘인지’한다는 뜻보다는 ‘실천한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결국 공자는 우리에게 운명은 앎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군자는 하늘의 정해진 ‘객관적인 측면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운명, 즉 소명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도 운명을 아는 것보다 명분을 찾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라고 조언합니다.
“내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를 파악하고, ...목숨을 걸 만한 명분을 찾는 일이다.”
권영민 소장(권영민인문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