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인은 그 반대다.”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小人反是.(군자 성인지미, 불성인지악. 소인반시)” 《논어∙안연》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2010년 개봉하여 국내 총 관객 수 276만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 <부당거래>에서 ‘부당한 거래’의 다른 한 축인 검사 주양(류승범 분)의 극중 대사입니다. 그는 거래나 관계에서 타인을 잘 대해 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버릇만 나빠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집안 환경에서 자란 그는 부러울 것 없는 검사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검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의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에게 어떤 손실과 부당한 일이 발생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마치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된 부당한 ‘갑을(甲乙)’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최근에 계약서에서 등장하는 ‘갑을’이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 큰 이유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더해 ‘갑’이라는 용어도 부족한 지 ‘슈퍼갑’이라는 용어도 회자되고 있다.
“흡혈박쥐는 하루도 쉬지 빠지지 않고 밤마다 100킬로미터 이상 멀리 다니면서 동물이나 가축의 피를 빨아먹어야 한다. 하루라도 먹지 못하면 안된다. 그러나 흡혈박쥐가 매일같이 피를 빨아 먹도록 동물이나 가축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성공률이 높지 않다. 이렇게 사흘만 굶으면 죽기 직전까지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동료 박쥐가 자신의 피를 토하여 굶주려 있는 다른 박쥐에게 피를 나누어 주는 행동이 발견되었다. 동료의 도움을 받은 박쥐는 자신도 또한 다른 박쥐의 어려움을 도와준다고 한다.
한편, 자신밖에 모르고 동료박쥐가 굶어 죽어가도 모른 체하는 박쥐는 굶주리게 될 때 도움을 받지 못하여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돕고 협력하는 박쥐는 12년 정도를 살지만, 자신밖에 모르는 박쥐는 평균 수명이 3년 정도라고 한다.” -서재홍, 《인성아, 어디 갔니?》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이신 서재흥 선생님은 자신의 책에서 흡혈박쥐의 상생의 관계를 소개하는데, 서로 돕고 협력하는 박쥐는 12년 정도를 살지만, 자신밖에 모르는 박쥐는 평균 수명이 3년 정도라고 소개합니다. 상생은 흡혈박쥐의 수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경쟁사회에 사는 우리는 대부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경쟁관계를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만 생각하면 인간관계에서 더 중요한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보이지 않는 실’은 정작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상호적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앞으로도 지속되는 까닭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지 않고 상대방의 이익과 성공을 돕는 ‘보이지 않는 실’을 보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치가 ‘갑’의 입장일지라도 ‘을’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정신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논어∙위령공》는 또다른 황금률을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부당한 ‘갑을’의 관계만 존재했던 것일까요?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주종(主從)’의 관계, ‘갑을(甲乙)’의 관계는 상존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계급과 신분으로 구별된 사회에서는 ‘주종’의 질서 사회가 유지됐지만, 고대 로마시대의 ‘갑을’ 관계로 일컫는 ‘클리엔테스’와 ‘파트로네스’의 특수한 신분질서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갑을’ 관계와는 우리 시대와 다른 면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시대에서 신분 관계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파트로네스’(지방의 유력자, 후원자, 보호자. 그 당시 지역의 유력한 귀족을 뜻함)는 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렸습니다. 반면에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의 보호와 후원을 받고 그를 지지하는 평민세력을 말합니다. 이 ‘클리엔테스’에서 파생한 단어가 바로 ‘클라이언트(client)’라는 말로 ‘단골, 고객, 손님’ 등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둘의 관계는 오늘날의 ‘갑을’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이 둘의 관계가 잘 설명되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클리엔테스는 사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단순히 '피보호자'로 번역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파트로네스’는 보호자이고 ‘클리엔테스’는 피보호자라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보호자와 피보호자라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건국 당시부터 700여 년 동안 대단히 중요한 인간관계이자 대외관계였다.”
시오노 나나미의 지적처럼 로마사회에서는 지금처럼 일방적이거나 ‘주종’의 관계라기보다 서로 필요한 부분을 보충과 보완해주는 관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호혜적 관계, 상부상조적 관계였던 것이다. 이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거래와 관계에서 상호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다면 결국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비단 로마인뿐만 아니었다. 유럽 사상의 한 축을 담당하는 히브리 사상의 유대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말처럼 유대인은 사회적 관계를 자신만의 안녕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유대인의 신체적인 안녕에 책임을 느껴야 하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유대인의 행동에도 책임감을 느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 공동체 의식이 강한 측면이 있는데 한 사람의 잘못이 모든 이에게 고통을 준다는 생각이나, 또한 한 사람의 즐거움이 모든 이에게 즐거움이 된다는 생각처럼 한 개인의 삶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고 공유한다고 보았습니다. 유대교 교사인 숄로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제자들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나무 꼭대기의 열린 사과를 따기 위해 맨 위로 올라간 사람이 그 사과를 딸 수 있도록 인간 탑을 만들자고 사람들에게 제안해 탑을 만들었는데, 탑의 맨 아래에 있는 사람이 ‘내가 여기 이렇게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그 사과가 내 손에 들어오지는 않을 텐데 말이지!’라고 말하고는 옆으로 빠져나와버렸다면 그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우리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든 똑같이 필요한 존재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전체는 바라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없다.”-조셉 텔루슈킨 《죽기 전에 유대인에게 물어라》
현대사회에서 계급과 차별이 사라진 것 같지만 부당한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관계는 지속될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그러나 관계적인 사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는 항상 상호적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성공이 뒤따라옵니다. 모든 일에서 내가 경쟁에서 이기고 앞서가야 하는 한 가지 방식(룰, rool)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 공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군자’는 현대의 리더는 자신만 이기는 방법을 찾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수’입니다. 고수는 ‘나와 너’ 함께 승리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만 생각하지만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보이지 않는 실’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오늘은 ‘갑’의 위치에 서있을 때가 있지만 내일은 ‘을’의 위치에 서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타인에게 부당함을 끼치는 사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은 자신만의 생각으로 배에 구멍을 뚫는다면 그 판단이 아무리 옳더라도 결국 그 배는 좌초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날 돌봐 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 자신만을 위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을 한 현자의 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권영민 소장(권영민인문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