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누군가에게는 밥벌이일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가 경험한 사회생활이 내 또래의 그것에 비해 특별히 더 비합리적이었다거나 비인간적이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대체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든 법이며 내 주변의 일들이 티비 속 드라마보다 막장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나 역시 회사를 다니며 여러번 지긋지긋함을 느끼곤 한다. 그 모든 환멸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는 마법의 주문은 "이건 내 밥벌이다" 였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그러므로 차마 같은 공간에서 숨쉬기도 싫은 인간들을 견딜 수 있었음으로 미루어 볼 때, 밥벌이, 즉 먹고 사는 문제의 절박함이 내 내면의 꽤 단단한 기둥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삭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일하기 위해 '이 지겹고도 고단한 밥벌이' 라는 주문만큼 직효인 것을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랴, 먹고 살기 위해 그냥 내가 참는수밖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늘 먹고 사는 것과 관계 없는 것들을 갈망해왔다. 그림을 보러 다니고, 좋은 음악을 듣고, 적확한 표현과 기막힌 시선으로 번뜩이는 글을 읽는 것이 끔찍할만치 좋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벗어나, 커다란 그림을 마주하며 한동안 고요하게 앉아있고 싶고, 노란 조명이 감싼 무대위에서 연주자들이 켜고불고 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구경하고 싶다. 소리의 울림이 내 마음의 더 깊은 곳까지 미끄러지듯 내려가 유유히 유영할 때의 뭉클함은 확실히, 먹고 사는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순간임과 동시에, 먹고 살기 위해 품을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독을 스르르, 없애주는 치유의 순간이다.
한 악단을 십년동안 갈고닦은 예술감독이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그와 그가 지휘한 악단이 내게 준 '먹고 사는 일과 관계 없는 빛나는 기억들'은 그 무엇으로도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악단의 단원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연주는 먹고 사는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악단의 운영으로 인해 그들은 돈벌이를 한다. 많은 역겨운 일들을 밥벌이라며 참았을 것이고 어찌보면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나는 음악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향유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런 단원들과 그 예술단체를 향해 적지않은 무리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과 관계 없는 일에 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가'라며 분개한다. 예술에 부여된 '미'라는 속성으로, 그들의 고단한 밥벌이는 쉽게 탐미주의자의 시간낭비로 매도된다. 어찌보면 다 같이 고단한 밥벌이와 시름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본인이 몸담고 있는 회사 대표의 연봉(과 갖은 부수익) 수십억과 그 회사의 운영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적개심도 관심도 갖지 않지만, '먹고 사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 한 사람에게 지급하는 십수억의 연봉과 그 예술단체의 운영비를 두고는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호구짓이라며 길길이 날뛴다.
물론 이유는 있다. 그들에게 내 아까운 세금이 다만 얼마라도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세금은 이미 충분히 먹고 사는 것과 관계 없는 많은 일에 쓰여지고 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의 공교육 과정에서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학생들에게 수학과 철학, 물리학, 화학 등을 가르친다. 김치 담그는 일, 전구 갈아끼우는 일과는 하등 관계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덕분으로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해 알고,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사유하며, 먹고 사는데에 아무 지장이 없는 어떤 일련의 사고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그 덕분에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은 인간성을 획득한다.
일련의 사태로, 나처럼 마음의 일부가 허물어진 사람들도 피해자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단원들과 직원들이라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그들이 십년동안 '밥벌이'를 하는 와중에 일구어 낸 빛나는 성취가 '굳이 안 해도 됐었을 , 먹고 사는 데에 지장없는 일' 로 매도당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소속된 직장의 명예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그 어떤 직장인보다 불안한 고용상태를 견뎠을 그들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러는 와중에도, 밥벌이를 위해 연습을 하고 무대에 올라야 한다.
세상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한가하기에 이런 꽃이며 아름다운 여성을 그리고 앉았냐는 누군가의 말에 르누아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보시오, 그림 그릴 물감 값을 마련하기 위해 코트를 팔았다오. 그의 작품이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작업이 한가한 것은 아니다. 그림 그리는 것은 그에게도 밥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