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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서 칼럼 Apr 07. 2024

중2병엔 약도 없다는데

임수정 빙의가 웬말인가


시공간이 오그라들 것 같은 멘트를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전설의 '중2병'이 창궐하던 15살 무렵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중2병엔 약도 없다. 그저 잠자코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늘, 나는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당시 질풍노도의 '중2' 취향을 저격하는, 마약 같은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눈을 뜨고 만 것이다. 








이 드라마는 메인줄거리부터 심상치 않다. KBS 드라마 프로그램 정보에 따르면, '어린 시절 호주에 입양된 후 거리의 아이로 자란 무혁이 은채를 만나 죽음도 두렵지 않은 지독한 사랑을 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죽음도 두렵지 않은 지독한 사랑'이라는 것만 봐도 각이 나오지 않는가. 얼마나 애절하고 감성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말이다. 



특히 독백 나레이션이 장난 아니게 애절하다. 드라마 중후반쯤 나오는, 무혁(소지섭)의 "내게 남은 시간, 저 여자만 내 곁에 두신다면 (중략) 증오도 분노도 다 쓰레기통에 처넣고 조용히, 조용히 눈 감겠습니다"라거나, 마지막회 속 은채(임수정)의 "살아서도 지독하게 외로웠던 그를 혼자 둘 수가 없었습니다"와 같은 멘트를 듣다보면 마치 내가 그들이 된 것마냥 가슴이 답답해졌다. 공감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독한' 사랑이란 엄청난 후유증을 남기니까. 



당시 나는 내가 은채가 된 것마냥 드라마에 과몰입을 했다. 내가 특히 꽂혔던 장면은 은채가 무혁을 향해 울부짖으며 고백했던 장면이다. 잠깐,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은채는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는 무혁에 섭섭했는지, "나도 원하는 것도 있고, 갖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참아도 참아도 참아지지 않는 게 있어. 알아? 나도 너네들하고 똑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고!"라고 폭풍 분노를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아저씨"라고 무한 반복하면서 고백하기 시작한다. 









중2병이 극심했던 당시의 나는 이 장면이 마음 깊이 와닿았는지, 학교에서 기승전 사랑고백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내 이상한 행동도 받아줄 만한, 친한 친구들에게만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마냥 아련한 눈빛을 한 채, 다짜고짜 "사랑해요"라고 애절하게 말한 것이다. 그 순간의 나는 임수정이었고 상대는 소지섭이었다. 상대가 떨떠름해하든 어이없어하든 안중에도 없었다. 



이처럼 나의 중2병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함께했다. 회차가 거듭할수록 무혁과 은채의 지독한 사랑이 걷잡을수 없이 커져간 것처럼 내 병도 급속도로 악화됐다. 지금은 밈으로도 활용되는 대표적인 대사, 무혁의 "밥 먹을래. 나랑 살래! 밥 먹을래 나랑 같이...죽을래!" 장면에서도 내가 임수정이 된 것마냥 마음을 졸였으니까. 



여기까지 쓰고나니 잠깐 걱정이 된다. 드라마를 너무 디스한 것 같아서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 혹시나 오해할까봐 말하는데, 드라마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애청자였다. 얼마나 애청자였으면 드라마 종영한지 약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도 대사를 기억하고 있겠는가. 



그저 나는, 당시 드라마에 너무나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흑역사를 만들었던 내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드라마에 너무나 고마울 지경. 또한 흑역사마저 소중하다. 그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일부고, 그런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거니까. 글을 마무리하기 전, 드라마 속 임수정의 처절한 고백씬을 응용해 치열했던 중2시절을 견뎌낸 내게 사랑고백을 하고 싶다.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나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 " 


#드라마 #미안하다사랑한다 #옛날드라마 #임수정 #중2 #중2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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