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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서 칼럼 Apr 14. 2024

회사 '밖'이 지옥이라고요?


드라마를 보다 보면, 유난히 가슴에 와닿는 대사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대사는 인생의 지혜를 전해주고, 무한 공감을 부르지만 또 어떤 대사는 유달리 불편하면서 꺼림칙하다. 나에겐 tvN <미생(2014)> 한 장면이 그랬다. 오차장(이성민)이 퇴사한 선배를 만나는 장면인데, 선배는 말한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말아라. 밖은 지옥이다."


극 중 선배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출까지 받아 어렵게 차린 가게 문을 닫게 된 상황.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드라마를 본 시점까지만 해도 극 중 설정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했건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 대사는 오래도록 내 마음 깊은 곳에 살아남아 나를 괴롭혔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자꾸 그 대사가 떠올랐다. 출근을 하느니, 차라리 차에 치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꾸역꾸역 회사에 갔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만한 생각이라고 합리화하면서, 그렇게 나는 회사라는 '전쟁터'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한계가 찾아왔다. 2021년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인터넷 매체를 다니면서 웹소설 연재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선 기사를 작성하고, 퇴근 후엔 웹소설 원고를 썼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텍스트로 구체화한다는 점에서 두 작업은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장르였다. 굳이 따지자면, 기사는 논픽션이고 소설은 픽션에 속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찌 됐든, 둘 다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는 일인지라 내 머리는 매 순간 지끈거렸다. 아침엔 겨우 일어나 화장은커녕 세수만 하고 출근하고, 밤에는 노트북 앞에서 글을 쓰다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살다보니 체력에도 무리가 오기 시작했고 몸도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야위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냥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둘 다 잘하고 싶었다. 그렇게 잘하고 싶은 마음은 나를 힘들게 했다. 오히려 무능하게만 느껴졌다. 


직업 특성 상 느끼는 회의감도 한 몫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기사를 쓰는 직업은 ‘기레기’로 불리면서 조롱을 당하니까. 실제로도 조회수 등 성과 압박으로 인해 자극적인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기레기’라고 셀프디스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기도 하고.  그 시절의 나 또한, 스스로를 기레기로 여기면서 회사 생활을 버티고, 집에선 ‘재미 없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 웹소설 원고를 쓰니 잘 될 턱이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지옥에 있었다. 드라마 대사대로라면 "회사는 전쟁터고 밖은 지옥"이니까, 분명 나는 지옥이 아닌 '전쟁터'에 있는 것인데 이상하게 자꾸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회사는 그만뒀고, 웹소설은 담당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재'를 선언했다. 여기도 저기도 모두 지옥이라면, 차라리 '다른' 지옥을 경험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용감했다. 제대로 된 계획 없이 저지르는 퇴사는 반드시 후회할 거라는 식의 메시지를 귀에 딱쟁이가 얹을 정도로 지겹게 들었건만, 그럼에도 무계획으로 그만둔 것이니까.


아, 지금 생각해보니 완전한 '무'계획은 아니었다. 퇴사 전, 강릉 한달살이를 계획하고 바로 에어비앤비 예약을 질러버렸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한달살이를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 선택한 결정이었다.


많고 많은 도시 가운데 왜 하필 강릉을 택했는지, 그 이유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30년 가까이 살던 서울에서 최대한 벗어나고는 싶은데, 막상 비행기까지 타고 멀리 가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랬던 내 머릿속에서 마침 떠오른 '만만한' 지역이 강릉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강릉의 한 에어비앤비에서 한달살이를 시작했다. 에어비앤비 내부는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고, 별 다른 소음 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산책로였다. 숙소에서 나와 조금만 걷다보면 푸른 숲이 보였고, 거기서 좀만 더 걷다보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보통 여름 바다엔 많은 이들로 붐비지만, 평일에 바닷가를 거닐면 사람도 거의 없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강릉에서 나는 글을 썼다. 오전 느즈막히 집에서 나와 산책 좀 하다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 밤에는 집에 돌아와 야경을 감상하며 글을 마무리했다. 당시 내가 주로 썼던 글은 웹소설 원고였다. 휴재를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원고를 담당자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창 연재를 할 때보단 마감 압박이 덜해졌고 시간 여유가 생긴 만큼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글이 이전보다 술술 써졌다. 아마 강릉이라는 환경 영향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는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고 비유하면서 퇴사를 만류하지만, 누군가에겐 회사 역시 지옥일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지옥"으로 불리는 바깥 세상이 전쟁터이자 천국일 수 있다는 것을. 


지옥으로 여겨졌던 세상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나는 행복해졌다. 이쯤에서 드라마 속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했던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각자의 전쟁터와 지옥은 저마다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고. 누군가에겐 회사 안이 지옥일 수 있다고. 적어도 내겐, 애써 회사 생활을 버티고 버틴 그 순간들이 '지옥'이었고, 그 지옥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야생의 전쟁터'라는 세상에 눈 뜰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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