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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Aug 21. 2024

출근 2주 만에 회사가 망했다

아니 하나의 제품팀 만들려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회사를 폐업한다고요?

갭이어를 아주 끝장나게 다녀왔다.

16년부터니까 근 10년을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이번에도 스타트업에 오게 되었다. 근데 이젠, 시니어로. 안다. 이걸 기회로 삼아야 다음이 열린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내 나이대가 각 팀의 요직에 분표 되어있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뜨였다. 물론 작은 회사라서 그런 거지만 이제 정말 사회의 허리가 되었구나. 결정권을 들고 실제로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Confort zone 내에서 '이거 어떡해요'라고 미루면 편하지. 그런데 어쩌나 이번엔 리드도 팀장도 뭐가 없다. 그렇다고 회사에 없는 건 아니지. CEO도 팀장이다. 카운터파트도 리더고. 심지어 눈 밖에 난 사람도 어찌 보면 하나의 팀이 되어야 한다. 의사결정이란 혼자 내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

내가 하는 업은 잘 듣고 장표로 표현하는 게 8할이라(나머지는 짬에서 오는 제시랄까...) 일단 상황에 맞게 맥락을 파악하고 가고자 하는 지점을 공유하는 게 먼저다. 결국 프로덕트 매니징이란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고 대하는 사람의 폭이 곧 경험의 폭. 이번에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업팀끼리도 중구난방으로 가지고 있던 일거리들을 정리해서 가시화하고 개발팀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한 판을 짜는 것. 일단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미팅을 했고 캐릭터를 파악했다. 아 이 사람은 얘기를 들어줘야 되는 사람, 아 이 사람은 스킨십이 많아야 되는 사람, 아 알잘딱깔센. 새로운 대표, 새로운 카운터파트에, 새 도메인. 잘 맞출 수 있을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혼자 애쓰지 말잔 생각도 들고. 그러다 예전에 읽었던 퍼블리 책 리뷰를 발견했다.

지치지 않고 과업을 완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이블이 될만한 문장들을 뽑아보았다. 아래는 문장과 적용.

핵심 이해 관계자 및 비즈니스 파트너와 끈끈한 관계를 만드는 작업을 하라. 두 가지로 그들을 설득하라. (1) 그들이 업무상 겪고 있는 제약사항을 잘 이해하라. (2) 그 제약사항들을 잘 반영한 설루션을 제공하라.

당연히 사업팀이 현장을 더 잘 안다.(고객은 또 다른 얘기지만) 그들 입장에서 추후 사업을 진행할 때 우려되는 부분이 없는지 항상 확인한다. 하고 싶은 것도 체크하고. 한두 팀이 아니라 모든 팀을 파악한다.


이해 관계자를 관리하는 것은 협력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개인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주일에 두세 시간 정도를 할애한다. 각 이해 관계자와 30분 정도 만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리고 아이디어에 대한 의견을 수집한다. 그를 확인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정기적인 회의 직전, 혹은 얼굴이 보일 때 이런 우려가 있다, 이거 어떡하지 툭. 그때 그거 생각해 보셨어요? 이거 어떤 거 같으세요? 이런 게 우려되는데, 같은 것.


각 이해 관계자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들에게 높은 충실도의 프로토타입을 보여 주고, 자유롭게 우려 사항을 제기할 기회를 제공하라.

시각자료는 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향성만 담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업자에게는 최대한 완성된 형태를 전달한다.


걱정보단 수월했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주눅 들어있었는지 알겠다. 그래 하면 되잖아. 이 와중에 방향을 짚는 걸 보고 화내지 말라고 한소리 듣는다던가 하면 잠깐 서운했는데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운 좋게도 알아서 빨리 움직이는 이들로 새 조직 주요 인사들이 구성되어 있었고 아닌 사람은, 냉정하지만 눈 밖에 날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대처는 해야 하니까, 그저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게 정해져야 되나요? 같이 운만 띄우고 하염없이 듣는다. 하다 하다 안되면 그냥 우려를 표하고 넘어가기. '이거 돼야 되는데.'


그렇게 2주. 이제 드디어 장표도 다 정리되고 가열하게 프로젝트를 돌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표가 통보했다. 회사가 망했다고. 투자를 새로 받아야 할 상황도 아니었고 당연히 그럴 기미도 안보였고(그러니까 입사했겠죠?) 지난주만 하더라도 대표랑 으쌰으쌰 해보자고 밥도 먹었는데 진짜 황당하게도 하루아침에, 지분구조가 문제가 되어 회사가 폐업하게 되다니. 이 정도면 월급쟁이 하지 말라고 누가 고사라도 지내는 수준 아닌가?


자리에 올라가려면 그 자리에서 부는 바람이 있는데 바람을 맞을 용기가 있어야 -전 쥬비스그룹 대표, 조성경


도대체 그 자리가 어디기에 이렇게까지 강풍인 거예요. 다시 이력서를 등록하고 들어왔던 자리를 살펴보자 나의 다음 5년, 10년은 (스타트업 기준에서는) 이제는 정말 정말 윗자리들인 거 같은데 (실리콘밸리 발 PO(Product Owner) 테크트리로 의사결정에 훨씬 더 많이 관여하게 되면서부터 그리되었다.) 덤으로 주어진 쉬는 시간, 안 해본 조각들을 맞춰보는 시간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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