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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어둠으로 이어지는 파일

by 몽골왕자 Jan 09. 2025

윤하진은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손에 쥔 작은 메모리카드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 작고 평범해 보이는 칩에 담긴 영상이 또 어떤 지옥도를 펼쳐 보일지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보면 또다시 충격받고 악몽에 시달릴 수도 있어...”


그러나 외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 않음을, 그녀는 이미 수없이 배웠다. 골목의 환영, 평행선상의 ‘또 다른 나’들, 그리고 ‘F. Ko’라는 미스터리한 존재에 얽힌 비극들이 모두 이 파일과 연결되어 있을 터. 하진은 결심했다. 오늘 안에 영상을 확인하겠다고.


집에 돌아온 하진은 현관을 닫고 나서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의자에 앉았다. 메모리카드를 조심스럽게 꺼내 USB 리더기에 꽂았다.


탁—


노트북 화면에 새 드라이브가 뜨자, ‘VIDEO’ 폴더가 보였다. 용량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폴더 안에는 여러 개의 MP4 파일이 있었다. 파일 이름은 숫자로만 되어 있었다.


“이게… ‘1995년’ 사건과 이후의 영상을 편집한 거라더니.”


잠시 망설였지만, 더 지체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하진은 첫 번째 파일 ‘1995.mp4’를 재생했다. 음소거로 시작된 화면 속, 오래된 캠코더 화질임이 분명한 화면이 나왔다.


영상은 한적한 새벽의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길거리에 세워진 낡은 포스터, 낮은 담장, 그리고 흐릿한 가로등. 카메라가 흔들리며 전방을 좇아가는데, 어느 순간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으… 아악….”


카메라가 초점을 잡고 다가가자, 바닥에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젊은 여자가 보였다.


영상 속 인물의 얼굴이 자기 자신과 닮아 있었다. 과거 사진에서 봤던 ‘그 피해자’와도 같았다.


영상 속, 쓰러진 여성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듯 가쁘게 헐떡이더니, 이내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쏟아지는 피를 붙잡으며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열쇠를… F. Ko… 으으….”


손에는 확실히 열쇠가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 열쇠는 분명 하진이 전에 본 구식 모양과 흡사했다. 카메라는 한동안 쓰러진 그녀를 비추다가, 갑자기 화면이 튀며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장면이 변한 뒤에는 골목 벽면 근접 촬영이 이어졌다. 빛바랜 벽에 누군가 붉은 스프레이로 쓴 문장이 보였다.


“진실을 본 자,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다 영상은 곧장 끊겼고, 이번엔 또 다른 파일로 넘어가는 듯 자동 재생되었다. 이번 파일엔 연도가 적혀 있지 않았다. 화면 한가운데 텅 빈 방이 비쳤다. 방은 창문도 없는 음침한 공간으로, 천장에 벌거숭이 전구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방 안에는…. 또 다른 ‘윤하진’이 앉아 있었다. 이마에 피가 흘러내렸고, 손목엔 결박 자국이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포박당했다 풀린 것처럼.


“날… 왜 여기로 데려왔지…?”

화면 속 하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이크가 잡아내는 숨소리가 한껏 거칠었다.


카메라가 약간 흔들리며, 그 시점에선 촬영자가 숨죽이고 있는 듯 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화면 어둠 속에서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F. Ko’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아우라가 전해졌다.


“이제 곧, 또 다른 네가 나타날 거야.”

그 남자는 낮고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서로를 죽일지도 모르지.”


카메라는 이 말을 끝으로 다시 꺼졌다. 영상은 짧았지만, 하진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마치 과거와 미래를 비튼 장면이 한데 뒤섞인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영상들은 더욱 파편적이었다.

또 다른 골목또 다른 하진피투성이가 된 손… 장면들이 마구 끊어지며 재생됐다. 분명 시공간이 달라 보이는데, 모두 ‘윤하진’이라는 동일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화면에선 손에 칼을 들고 ‘누군가’를 찌르는 모습이, 또 다른 화면에선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 비춰졌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 그러나 등장인물의 얼굴은 하나같이 하진 자신.

하진은 숨을 고르며 화면을 바라봤다. 이 모든 영상이 진짜라면, 평행선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어가는 끔찍한 광경이 된다는 뜻일까?


“이런 게… 정말 가능하단 말이야?”


한시도 눈을 떼기 힘들었고, 동시에 구토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이제껏 골목에서 직접 본 악몽이,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로 펼쳐진 느낌이었다.


마지막 파일이 재생되자, 화면에 어둑한 실루엣이 잡혔다.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 이번엔 얼굴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40대쯤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잿빛 머리카락, 마르면서도 탄탄한 체격. 카메라가 삼각대에 고정된 듯, 그가 직접 렌즈 앞에 섰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영상을 보는 당신… 아마도 여러 윤하진 중 한 명이겠지.”
 

그는 먼 곳을 응시하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나는 F. Ko. 당신이 궁금해할, 이 열쇠의 ‘창시자’이자… 동시에 저주에 갇힌 사람이다.”


하진은 모니터를 붙잡고 숨을 삼켰다. 마침내 당사자의 목소리가,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나 설명은 짧고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모두 선택을 강요당해 왔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사슬, 그것을 끊을 사람도, 혹은 이어갈 사람도 결국 ‘윤하진’인 너희다.”


그는 이어, ‘열쇠’로 인해 시간의 틈이 열렸고, 여러 갈래 윤하진들이 서로를 교차하는 비극이 일어났음을 암시했다.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했다.


“내가 만든 이 열쇠들은, 살아남는 자와 죽음을 택하는 자를 결정짓는 ‘의식’의 도구다. 결국,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네 몫이다. 나는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영상은 그대로 정지되었다. 하진은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노트북 화면을 노려봤다. 


‘의식의 도구’… ‘진실을 마주하라’… 


지금껏 수많은 단서가 반복해온 얘기지만, 이번에는 F. Ko의 직접 육성이었다.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이 자는 자기에게 뭘 원하는 걸까. 진정으로 ‘시간의 틈’을 봉인하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살인을 부추기는 건지.


잠시 노트북을 덮고 머리를 식히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하진은 심장이 멎을 듯 두려웠지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노이즈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영상을 봤지? 어떻게 할 건가.”


하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소리는 전혀 낯선데, 왠지 ‘F. Ko’인가, 혹은 또 다른 대리인인가… 분간이 안 됐다.


“누구세요?”

“내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아. 네가 지금부터 어떤 선택을 할지가 중요하지.”


그는 멈칫하더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열쇠와 마주하기 두려우면, 지금 포기해. 네 기억이 사라져버리도록 도망치는 방법도 있어.”


“기억… 사라진다니?”

하진은 숨이 가빠졌다. 정말로 포기가 가능하다면, 차라리 이 모든 게 없던 일처럼 잊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다. 결국 시간을 벌 뿐, 근본적 해결은 안 될 거라고.


“그렇게 하면, 또 다른 살인이 벌어지겠죠. 제가 외면하면 ‘누군가’가 희생될 거고.”

그녀는 목소리를 떨며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 상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겠지. 네가 줄곧 선택에서 도망친다면, 이 세계 어딘가의 ‘너’가 대신 피를 흘려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어. 네가 그 의식을 마무리 짓는 것.”


뚜뚜뚜—

상대는 더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하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서늘했다. 영상을 막 보고 난 참에, 누군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전화를 걸어온 셈이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하진은 테이블로 가서 메모를 펼쳤다. F. Ko의 편지, 영상 내용, 그리고 ‘열쇠’ 등 모든 단서를 정리해야만 이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5년 첫 살인사건: 피해자와 범인 얼굴이 동일.  


    ‘평행선상의 윤하진’들: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이 계속됨.  


    F. Ko가 창시한 열쇠: 시간의 문을 열고, 의식을 진행하게 만드는 도구.  


    결국, ‘진실을 마주해야’ 이 사슬을 끊을 수 있음.  


문제는 ‘진실’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슬을 끊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를 죽이고, 하나가 살아남는다’는 식의 잔혹한 결말로 끝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대안이 있을까?


하진은 마음 깊은 곳에서 희미한 저항감을 느꼈다.


“나는… 또 다른 나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걸까? 정말 그게 최선이야?”


노트 속 문구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타인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다. 살인을 멈추려면, 먼저 스스로를 용서하고 마주해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한다….

지금까지 하진이 겪은 ‘또 다른 나’들은 전부 자신에게 결핍된 감정의 극단을 대변하는 듯했다. 분노, 공포, 절망… 그러다 결국 마주쳤을 때 살인을 저질렀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행동이었는지, 혹은 운명을 거부하는 몸부림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해가 저물 무렵, 하진은 숨죽여 결심했다. 다시 한 번 골목으로 가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 갔던 ‘창문다방’ 근처 골목, 1995년 살인사건의 무대. 거기서 다시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영상을 보니, 그 장소가 여전히 ‘차원적 겹침’이 발생하는 핵심 지점 같았다.


“매번 위험했던 장소였지만, 언젠간 맞닥뜨려야 해.”

“오늘 밤… 다시 가보자.”


이 무모한 결심이 어떤 파국을 부를지 알 수 없었지만, 뒤로 미룬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진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휴대폰을 배터리 완충 상태로 만들고, 가방에 간단한 호신용 물건을 챙겼다. 그리고 열쇠와 편지, 노트도 함께 가져갈지 고민했지만, 노트는 너무 크기에 집에 두기로 했다. 열쇠와 편지만 주머니에 넣었다.


밤 열한 시 무렵, 하진은 택시를 타고 도심 외곽의 낡은 거리로 향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야경은 화려했지만, 그녀 마음속은 폭풍 전야처럼 무겁고 불안했다.


“설마 또 ‘다른 나’가 나타나서 공격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손이 떨려왔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 입구로 들어섰다. ‘창문다방’이라고 적힌 허름한 간판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이미 문은 닫은 듯, 실내 불이 꺼져 있었다. 주변은 적막했고, 멀리서 고양이 울음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을 때마다, 길바닥에 깔린 오래된 아스팔트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이 골목 어딘가에서, 이미 윤하진은 여러 번 ‘죽었거나 죽였거나’ 하는 불길한 운명을 마주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가로등 빛이 깜빡이는 골목 중앙쯤 왔을 때, 하진은 발을 멈췄다. 익숙한 기시감. 이곳이 바로 지난번에 쓰러진 자신을 봤던 그 자리다.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한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 할까? 기다리면 ‘무언가’ 나타나 줄까?


“휴…”


그녀는 길가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머니에 든 열쇠를 꽉 쥐었다. 지독한 공포가 몰려왔지만,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타나 봐. 더는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골목이 정적에 잠긴 상태로 몇 분이 흘렀다. 어느새 뒷골이 서늘해졌다. 이윽고 들려오는 발소리.


탁… 탁…


하진은 숨을 멈추고, 소리나는 방향을 주시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또 다른… 나?”


그러나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까이 올수록 그 실루엣이 또렷해졌다. 이번엔 예상과 달리, 윤하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는데, 가까워지자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머리가 희끗한 40대 남성. 하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F. Ko가 영상에서 잠시 비춘 얼굴과 매우 흡사했다.


남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하진을 마주 보았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영상을 본 모양이군.”


하진은 당황했다. 


“설마… F. Ko?”


그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는 듯 입술만 살짝 움직였다. 확신은 없었지만, 하진이 봤던 영상 속 남자와 똑같이 생긴 점으로 미루어보면 이 사람이 ‘진짜 F. Ko’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왜 나타난 거죠? 갑자기.”


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는 시선을 골목 바닥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이 골목을 찾아올 것 같았어. 자발적으로 사건의 무대에 서길 선택했군.”


그 말에 하진은 오만 감정이 뒤섞였다. 오히려 묻고 싶은 건 자신의 쪽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뭐죠? 정말 열쇠를 봉인시키려고? 아니면 또 다른 살인을 부추기는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골목의 중압감이 그녀를 짓누르듯, 휘몰아치는 질문들이 끓어올랐다.


남자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저었다.

“살인을 바라지는 않아. 다만, 이 의식에는 대가가 따른다. 누군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게 이 열쇠의 저주이자 룰.”

그는 시선을 들어 하진을 똑바로 보았다.

“난 이걸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했지. 결국, 너희 ‘윤하진’들이 나타나야만 이 사슬이 풀릴 거라 믿어.”


하진은 숨을 골랐다.

“제발 더 이상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진짜 이 저주를 끝낼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남자는 골목을 한 번 둘러본 뒤, 부드럽지만 비극적인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가 직접 골목의 ‘의식’을 완성해야 한다. 그건 네 안의 모든 ‘너’를 용서하거나, 혹은 영영 지우는 일. 어떤 방식을 택해도 결국 선택은 하나일 거다.”


“용서…?”


이 말이 하진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다른 나를 안아주는 길이 있을까? 아니면 한 명만 남기고 다 죽여 없애는 길뿐일까?


그때, 골목 끝에서 문득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가로등이 깜박이며 어둠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하진과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또 한 명의 윤하진이 서 있었다.


쇳빛 눈동자에 무표정한 표정. 손은 무엇인가 꽉 쥔 모양이었다.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고, 옷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역시… 또 나타났네.”


하진은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번엔 칼 대신, 다른 물건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낡은 권총 같았다. 실제인지 장난감인지 분간이 안 됐지만,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당신이 F. Ko냐?”


그 ‘또 다른 하진’이 남자를 노려보며 묻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너를 죽이면, 이 사슬이 끝난대….”


“뭐라고…?”


하진은 충격을 받았다. 어디서 이런 황당한 결론을 듣고 왔나? 곧장 머리에 스치는 건 ‘키 큰 그림자’나 ‘다른 대리인’이 그런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 누군가 ‘F. Ko’를 죽이면 의식이 끝난다고 부추긴 걸까?


“진정해! 함부로 총 같은 걸 휘두르면 안 돼!”


하진이 소리쳤지만, 그 ‘또 다른 하진’은 이미 광기에 휩싸인 듯 보였다.


“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 이 열쇠의 저주 속에서!”


비명이 섞인 목소리가 골목에 메아리쳤다. 순간, 빛이 깜박이며 총구가 F. Ko 쪽으로 향했다.


“안 돼—!”


탕!


쇳소리와 함께 무언가 작동되는 소리가 골목을 때렸다. 총성이 진짜인지, 아니면 불발음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분명 큰 소리였다.


눈앞이 순간 번쩍이며, 가로등이 꺼졌다 켜졌다 하더니, 다시 어둠이 덮였다.


하진은 귀가 멍해지고 숨이 막혔다. 그 총알이 과연 발사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맞았는지조차 불확실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형체들이 엉켰다.


“크윽…”

피를 토하는 듯한 낮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얼른 달려가 확인해야 했다.


‘또 다른 하진’이 서 있는 위치 근처로 더듬어 다가갔지만, 이미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F. Ko는 무사한 걸까?


푸욱—

발밑에서 축 늘어진 누군가의 팔이 만져졌다. 이질적인 느낌에 하진은 등골이 오싹했다. 가로등 불빛이 다시 흐릿하게 살아나자, 하진은 바닥에 쓰러진 실루엣을 똑똑히 봤다.


“당신…!”


그건… F. Ko였다.


그의 가슴께가 붉게 젖어 있었다. 총에 맞은 듯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소리로 이어지지 못했다.


“안 돼… 이봐요! 정신 차려요!”

하진은 당황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골목은 텅 비었고, ‘또 다른 하진’은 사라졌다. 도망친 걸까, 아니면 어딘가 숨어 있는 건지.


F. Ko의 호흡이 짧게 끊어지듯 이어지고,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설마 이렇게… 죽으면…”

하진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사람에게서 들을 게 아직 산더미처럼 많았다. 이대로 죽게 두면 ‘진실’은 또다시 묻혀버릴 수도 있다.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안 돼…!”


하지만 그의 숨소리는 빠르게 희미해졌다. 손끝이 떨리는 걸 느끼며 하진은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누를까 하다가 머뭇거렸다. 


“경찰이 오면… 이 황당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또 다른 나’가 총을 쐈다고? 지금 총 소리에 경찰이 출동하면….”


양손으로 그의 상처를 눌렀지만, 의료 지식이 없기에, 지혈이 제대로 될 리도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F. Ko가 마지막 힘을 짜내듯 입술을 달싹였다.


“… 열쇠… 진실… 네가….”


말은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손이 떨리며 허리춤 주머니를 가리키는 듯했다. 혹시 또 다른 단서가 있나?

하진은 흑빛의 절망 속에서 그의 주머니를 뒤져 조그만 종이를 발견했다. 마치 ‘유서’처럼 접힌 종이였다.


“…봉인… 하… 거…”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가 스르륵 떨어졌다.


“안 돼…!”

하진은 그를 흔들었지만, 이미 숨이 멎은 듯했다. 골목 한복판에서, ‘열쇠’를 만든 장본인이 피 흘리며 절명했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처음엔 어둠을 뚫고 갑작스레 나타난 ‘F. Ko’, 그리고 또 한 명의 ‘윤하진’이 쏜 총격. 이제 F. Ko는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골목엔 음습한 바람만 불며 적막이 흘렀다.


하진은 혼미한 상태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나… 어떻게 해야 하지? 경찰을 불러야… 아니,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지?”


정신이 반쯤 아득해졌다. 시체 곁에서 머뭇거리다, 문득 그의 마지막 유품처럼 보이는 ‘접힌 종이’를 살짝 펼쳐 봤다.


거기에는 간략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봉인 의식 장소: … (주소) 지하실, 11월 27일 새벽 3시]


[열쇠를 새벽 3시에 맞춰… 반드시 …문을 열 것]


중간중간 글자가 번져 읽기 힘들었지만, ‘의식 장소’와 ‘날짜 11월 27일’, ‘새벽 3시’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이건… 1995년 사건이 발생했던 날이잖아.”

현 시점으로는 몇 주 정도 남은 날짜다. ‘F. Ko’가 의식을 완결하려는 최후의 스케줄을 잡아둔 것일까?


“그럼, 이 사람은 그 의식장까지 나를 유도하려 했던 건가….”


시체가 된 F. Ko를 노려보며, 하진은 복잡한 심정에 빠졌다. 이미 그는 죽었고, ‘또 다른 하진’이 총을 쥐고 도망갔다. 이제 모든 책임과 짐이 하진에게 떨어졌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두운 골목, 시커먼 그림자, 가로등 아래에 쓰러진 시신….

그 어떤 악몽보다 생생하고 처참한 현실이었다.

하진의 주머니에는 또 다른 열쇠, 그리고 막 얻은 ‘의식 장소’ 주소가 남았다.


“내가… 혼자서 이걸 봉인해야 해?”


그녀는 주저앉아 손을 덜덜 떨었다. 다음 달 11월 27일, 새벽 3시, 그곳 지하실에서 열쇠를 쓰라는 이 지령….

거기에 ‘하나가 죽고, 하나가 살아야 하는’ 의식이 기다리는 걸까?

그리고 그 의식장에 또다시 ‘다른 윤하진’들이 몰려들어 서로를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

곧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총성이 울렸으니 누군가 신고한 게 틀림없다. 더 지체했다간 꼼짝없이 현장에서 체포될지도 모른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결말은… 뭘까?”


하진은 숨을 몰아쉬며 의식을 잃은 듯한 F. Ko를 잠시 바라봤다. 그가 남긴 흔적이 이 골목에 뿌려진 피와 문서뿐이라면, 더는 그에게 의지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건 자신이 결판지어야 한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이 끔찍한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멀지 않아 크게 울릴 사이렌과 순찰차 불빛이, 곧 이 골목을 뒤흔들 것이었다.


“의식 장소… 11월 27일… 난 그때까지 준비할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 하진의 발걸음이 허공을 짓누르듯 묵직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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