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1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4회. 스며드는 피의 흔적

by 몽골왕자 Jan 11. 2025

윤하진은 어두운 골목을 황급히 빠져나왔다.


머릿속은 여전히 ‘F. Ko’의 죽음이란 사실에 얼얼했고, 심장은 미친 듯 요동쳤다. 


저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아득히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며, 그녀는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려 했다.


“서둘러… 여기를 벗어나야 해.”


피가 흥건한 시체와 곧 닥칠 수사. 명백히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경찰은 하진을 용의자로 의심할 게 뻔했다. 하지만 하진에겐 지금 그걸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도로변에 다다랐을 때, 눈길을 끌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걷다가 택시를 간신히 잡았다.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견딜 수 없었다.


“집… 집으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하자, 하진은 간신히 호흡을 고르며 창밖을 내다봤다. 가로등 불빛과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골목에 남겨진 ‘F. Ko’의 모습이 눈앞을 자꾸 맴돌았다. 손바닥에는 그를 붙잡았을 때 묻은 듯한 붉은 자국이 아직 선명한 기분이었다.


‘정말 죽어버린 거야…? 이 모든 상황, 어떻게 감당하지?’


F. Ko가 마지막에 건네려던 말 “열쇠... 진실… 네가…” 도중에 끊긴 그 비장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결국, 그는 ‘의식 장소’가 적힌 쪽지를 남긴 채 숨을 거둬버렸고, 하진은 급히 현장을 떠나야 했다.


‘이제 누구도,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을지도 몰라.’


설상가상으로, 어딘가 숨어 있을 ‘또 다른 윤하진’은 방금 F. Ko를 쏴 죽였다. 언제, 어디서 그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하진은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창문을 조금 열어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두려움이 가슴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집 앞 골목에 내리자, 이미 밤이 깊었다.


하진은 주위를 한바퀴 살폈다. 혹여 그녀를 미행하는 인물이 있을까 싶어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인적은 없고, 쌀쌀한 바람만 불어댈 뿐이었다. 얼른 계단을 올라 원룸 문을 열었다.


“하아…”


방으로 들어서서 문을 잠그고 등을 기댄 채, 하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 시간 달리고 뛰고, 긴장했던 탓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손에 쥐고 있던 쪽지와 열쇠가 생각났다. 정신 놓으면 안 된다는 신호 같았다.


“지하실… 11월 27일… 새벽 3시.”


그 짧은 문장이 곧 찾아올 ‘의식’의 핵심인 듯 보였다. ‘F. Ko’가 가진 최후의 비책이었을까, 아니면 주술 같은 의식의 무대였을까. 이미 11월은 코앞이라, 준비할 시간은 얼마 없었다.


갑자기 문 밖에서 띠딩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깜짝 놀라 몸이 굳었다. 경찰? 아니면 ‘또 다른 하진’?

 

경찰이라면 벌써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이렇게 정중히 벨부터 누를까?


“누… 누군가요?”


조심스레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두 번째 벨이 울렸다. 


하진은 긴장감에 숨이 턱 막혔다. 뭐든 피할 수만은 없으니, 그녀는 현관 앞에 서서 렌즈로 바깥을 살폈다. 


하지만 외부 조명이 어두워서 사람의 실루엣이 흐릿했다.


“경찰이면… 문 안 열면 더 수상할 텐데.”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혹시 곧바로 들이닥칠지 모르니, 체인 잠금장치는 걸어둔 채였다.


문을 살짝 열어본 순간, 뜻밖에도.


 “어… 사장님?”


열렸던 틈 사이로, 전자제품 수리점 사장님이 서 있었다. 낡은 모자를 쓴 모습.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미안, 늦은 밤에... ” 


사장님은 머뭇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진은 체인을 풀며, 놀랍고도 다행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저기… 무슨 일이시죠?”


“음, 사실 별건 아니고… 집 수리해주고 나서, 내가 깜빡 잊고 공구 한두 개를 놓고 갔거든요. 조금 전 손님한테 필요한 도구를 찾다 없어서. 그래서 혹시 여기 두고 왔나 해서 왔는데….”


사장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셨군요.”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장님을 안으로 들였다.


하진이 방 안 불을 환하게 켜자, 사장님은 안쪽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테이블 위엔 노트북과 노트 등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 자료와 기묘한 사진들이 섞여 있는 상태였다.


“찾았네요, 여기. 이 드라이버 세트.”


 사장님은 싱크대 근처에서 낡은 파우치를 발견해 들고 왔다.


 “이제 됐네. 오늘 고맙소, 덕분에 도구 못 찾았으면 곤란할 뻔했어요.”


하진은 멋쩍게 웃으며 배웅하려다, 왠지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 더 붙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밤중이긴 해도, 혼자 있으면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특히나 ‘F. Ko’가 죽는 걸 막지 못했고,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한 불안함이 컸다.


“사장님, 죄송한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그 부탁에, 사장님은 살짝 의아해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다면야.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긴 하네요.”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하진은 고민 끝에 조금씩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또 다른 나’와 ‘살인 의식’ 같은 걸 전부 말하기엔 너무 충격적이니, 일부는 걸러서.


예컨대, 괴상한 사건에 휘말려 어떤 의문스러운 ‘열쇠’가 있고, ‘중요한 사람’이 오늘 밤 불의의 사고로 죽었으며, 자신도 이젠 그만 둘 수 없는 상황이라고.


사장님은 그녀의 눈빛이 애절해 보이는지,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어느 정도 얘기가 끝났을 때,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음,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복잡한 문제에 휘말린 모양이네요. 누군가가 죽었다면… 경찰에 알리는 게 우선 아닐까요?”


“저도 알아요. 근데, 만약 알렸다가 ‘억울한 누명’을 쓸 가능성이 높아요. 증거가 너무 이상한 쪽으로 기울 수 있고…. 또, 이 일은 경찰이 개입하기에 너무 비현실적이고 수상한 부분이 많아요.”


하진은 울상을 지으며 털어놨다.


사장님은 침묵을 지키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혼자 견디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요? 전자제품 수리밖에 모르는 아저씨지만,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진은 뜻밖의 호의에 순간 울컥했다. 고립감에 빠져 있던 자신에게 이 사람의 태도는 작지만 큰 위안이었다.


“감사해요… 진짜. 사실 저도 어디 의지할 사람 없어서….”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쪽지를 내밀었다. ‘의식 장소: … 지하실, 11월 27일 새벽 3시’라 쓰인 그것.


“이게, 제가 꼭 가야 할 장소고 시간이라는데… 혹시 이런 식으로 폐건물 지하실을 검색하거나, 위치 정보 파악 가능할까요? 주소가 너무 낯선데요.”


F. Ko가 죽기 전 남긴 종이는, 대략적인 주소만 써 있고 구체적인 건 없었다. 사장님은 눈을 좁히고 쪽지를 읽었다.


“글쎄, 거기 표기된 지역이라면 옛날 공장이 있던 곳 같기도 하네요. 지도 앱이나 자료 찾아보면 혹시 폐창고나 지하 시설이 남아있을 수도….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


하진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네, 부탁드려요. 저도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려 했는데, 막상 당황스러워서…. 이 근방이 아니더라고요. 꽤 멀리 떨어진 지역이던데, 예전 재개발지라 폐허가 많다는 얘기도 있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하진은 수리점 사장님과 일종의 공조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사장님은 노트북을 켜 자료를 뒤지고, 하진은 휴대폰으로 지도와 폐건물 정보를 검색했다.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간, 원룸 안에선 두 사람이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서 열심히 고개를 맞댔다.


“여기… 신도시 개발이 무산된 지역이네요. 1990년대 후반쯤엔 땅을 파다 말아서 지하 구조가 복잡하다는 기사도 있어요. 여러 번, 공사했다가 방치됐다는데.”


사장님이 화면에 뜨는 자료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럼, 의식 장소란 게, 이런 ‘방치된 지하실’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하진은 ‘F. Ko’가 어째서 11월 27일을 지정했는지 생각하며, 아마도 1995년 살인사건이 벌어진 날짜와 동일시해 무언가 ‘봉인 의식’을 치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추론했다.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서 이 모든 걸 준비할 수 있을지.”


하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위험천만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대비를 잘하면 더 안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힘이 되면 좋겠는데.”


사장님은 궁금증이 이는 듯 물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그 열쇠 때문이라고 했죠? 그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거라고요?”


하진은 고민 끝에, 열쇠를 살짝 꺼내 보여주었다. 사장님은 놀란 기색으로 금속 문양을 쳐다봤다.


“전에 욕실 문턱에서 발견한 그 금속덩이와 비슷한 분위기인데… 훨씬 더 정교하네요.”


그는 조심스레 열쇠 표면을 만져보았다. 


“글자나 문양이 어딘가 주술적인 느낌도 나고.”


하진은 괜히 죄책감이 일었다. ‘이분에게 너무 이상한 세계를 보여주는 건 아닌가….’ 하지만 이미 얽힌 이상, 거짓말해봤자 소용없었다.


“이 열쇠가 어떤 문을 여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걸로… 봉인을 해야만 해요.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에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걸 쓰지 않고 도망치면, 또 다른 누군가가 피를 흘릴지도 모르거든요.”


딸랑—


방 안은 고요했는데, 현관문에서 이상한 진동 같은 소리가 느껴졌다. 마치 문 손잡이가 살짝 흔들리는 듯한. 


하진과 사장님은 동시에 소스라쳐 고개를 들었다. 늦은 시간이니, 누가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경찰인가?’


바로 그런 의심이 들었다. 아니면, 더 끔찍한 가능성, ‘또 다른 하진’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사장님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에도 이런 적 있어요?”


“아뇨, 전혀….”


하진은 침을 삼켰다. 창문 밖을 봤더니, 복도에 별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감으로 느꼈다. 누군가가 문 앞으로 다가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는 걸.


“우선 조용히 있어봐요.”


사장님이 현관에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하진도 숨죽였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 소리도 없더니,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간 걸까?”


그렇다 해도, 이미 소름은 잔뜩 돋았다. F. Ko가 살해된 직후, 누군가가 여기까지 찾아온다면, 그 동기가 무엇일까.


경찰이라면 곧바로 벨을 누르거나 노크를 했을 텐데, 방금처럼 슬쩍 문 손잡이만 만지고 갔다면 너무 수상했다.


사장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야겠네요. 오늘은 그냥 여기서 몸 사리는 게 좋을 듯한데…. 경찰이 아니면, 누군진 몰라도 좋진 않아 보여요.”


하진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현관 가까이에 대기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다행히 더는 인기척이 없었다. 시계는 이미 새벽 3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사장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흥… 오늘 밤은 긴장한 채로 지새야 할 모양이군요. 저도 집에 가긴 늦었고, 혹시 모르니 좀 더 있다 갈까요?”


하진은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다. 너무 고마웠다.


“정말 그럼 죄송하지만… 잠깐만이라도 계셔주시면….”


사장님은 가볍게 끄덕이며 거실 한편에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담요라도 갖고 올 걸 그랬네요.”


하진은 그 말에 미소 짓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내면은 복잡한 감정으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경찰 수사, ‘또 다른 하진’의 존재, 의식 날짜가 다가오는 압박, 그리고 F. Ko의 죽음….


정말 결말은 하나뿐일까? 누군가 죽어야만 끝나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이 


“이제 그만 조금씩 눈 붙이시라. 내가 주변 잘 살펴볼 테니.” 하고 말해줬다.


하진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몸이 너무 지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자정부터 줄곧 긴장한 채로 달려왔으니, 체력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대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머릿속은 떠다니는 생각들로 혼란스러웠지만,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자 이내 서서히 의식을 놓게 됐다.


“지하실… 11월 27일… 열쇠….”


마지막으로 이 단어들을 되뇌며,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하진은 어두운 골목 한복판에 서 있었다.


역시나, 그 지긋지긋한 장소. 시야가 흐릿하고 귀에는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


쿵쿵, 쿵쿵


심장 박동 같은 소리가 뚜렷했다. 바닥은 핏물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골목 끝에 ‘여러 명의 윤하진’이 모여 서 있는 광경이 보였다. 누군가는 칼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시체가 되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또 몇몇은 무표정하게 하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곧 결판이 나. 너도 알잖아… 11월 27일, 새벽 3시.”


칼을 든 ‘또 다른 하진’이 퍼뜩 웃으며 말했다. 


“누군간 죽고, 누군간 살아야 한다고!”


“아니야, 그런 선택 안 해!”


하진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터지지 않았다. 몸이 굳고, 숨이 막힌다. 시체가 된 자신을 바라보면서 공포가 밀려온다.


그때, 멀리서 F. Ko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모든 윤하진을 구원할 수도, 영영 소멸시켜버릴 수도 있어…. 열쇠는 너한테 있다….”


“구원할 수 있다고…?”


하진은 그 말에 매달리듯 절박하게 되뇌었다. 그저 한 명만 살아남고 다른 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잔혹한 룰이 아니라, 혹시나 모두를 살리는 길이 있을까 하는 희망이 솟았다.


하지만 곧, 칼을 든 ‘또 다른 하진’이 손을 뻗어 하진의 목을 움켜쥐었다. 피에 젖은 손이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차가운 기운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너만 그런 희망을 품는다고 바뀌진 않아….”


쿵쾅— 쿵쾅—


심장이 터질 듯 뛴다. 하진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꿈속에선 의지가 무용지물인 듯 움직이지 않는다.


“으으윽!”


비명과 함께 하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해가 희미하게 뜨는 아침이었다. 거실 창밖으로 옅은 햇살이 번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아… 하아….”


사장님은 창가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놀라 깨어나자, 걱정 어린 시선으로 돌아봤다.


“악몽을 꿨나 보군요. 땀을 많이 흘리시네.”


하진은 이마의 땀을 닦고 숨을 골랐다.


“네… 또 골목 악몽이에요. 갈수록 선명해지는 느낌이에요.”


잠시 아무 말 없이 정적이 흘렀다. 실내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하진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다시는 그런 꿈 꾸기 싫어요. 하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몰라요. 11월 27일이 다가오면… 전 뭘 해야 할지…. 죽이거나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고 다들 말해요.”


사장님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세상에… 난 이런 초자연적 이야긴 처음 듣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고, 또 죽여야만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고 믿고 싶네요. 만약 그 반대 방법이 있다면, 그걸 찾아봐야 하지 않겠소?”


하진은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반대 방법… 혹시, 모두가 살아남는 길 같은 거요?”


“그래요. 만약 ‘이 열쇠가 모두의 파멸을 부르지만, 동시에 봉인하면 구원도 가능하다’는 거라면, 꼭 한 명이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닐 수 있잖아요.”


사장님은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불안한 표정도 스쳤다. 


“물론, 막연한 낭만적인 소리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정말 그걸 원한다면, 포기하지 마세요.”


그 순간, 하진은 기묘한 따뜻함과 안도가 솟았다.


‘아직 가능성을 완전히 닫을 순 없어. 누가 죽는 걸 막아낼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조금 지나자, 아파트 복도에서 사람들 움직임이 느껴졌다. 등교나 출근 준비로 분주한 모양이었다. 늦은 밤의 공포가 무색하게, 일상은 다시 굴러가고 있었다.


사장님은 도구 박스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난 가게에 가봐야겠네요. 오늘 맡은 수리 작업도 있고. 대신, 아까 주소 조사 계속 해볼게요. 틈나는 대로 정보를 모아서 저녁에라도 알려드리죠.”


하진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더 알아볼게요.”


그녀는 ‘지하실 의식’의 실마리를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사건은 한계를 넘어섰고, 경찰에 달려가 해결해 줄 문제도 아니다. 정면돌파밖에 답이 없다는 게 무서웠지만, 불가피했다.


사장님이 돌아간 뒤, 하진은 베란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햇빛이 창유리를 타고 들어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칠흑 같았다.


그나마 사장님의 존재가 조금이나마 버팀목이 되어준 듯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고독이 가슴을 짓눌렀다.


“곧 11월 27일이 올 거야. 그때, 난 지하실에서 열쇠로 ‘무언가’를 열어야 하겠지. 그게 ‘봉인’일지, 또다른 참사일지….”


하진은 책상으로 돌아가 노트를 펼쳤다. 한 페이지에 큼직하게 적혀 있는 문장을 다시 확인했다.


“열쇠를 쥔 자,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라. 살인이 곧 답이 아니며, 죽음이 해방도 아니다. - F. Ko”


예전엔 이 문장조차 애매하게 느껴졌는데, 이제야 그 뜻이 조금 이해될 것 같았다. ‘살인이 곧 답이 아니다’. 반드시 한 명만 살아남고 끝나는 건 아니라는 암시처럼 들렸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어젯밤 걸려온 모르는 번호가 기록에 남아 있었다.


“삭제해버리자. 뭐 소용없겠지만.”


하진은 간단히 통화 기록과 메시지들을 지웠다. 그래봤자 상대가 다시 전화할 수도 있겠지만, 쓸데없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경찰이 혹시 핸드폰 추적하면 어떡하지? F. Ko가 사망했으니 당연히 내 번호를 캐볼 수도 있겠고….’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어떻게 대비할지 감이 없었다. 일단 그저 평소처럼 움직이되, 수리점 사장님의 조력을 받으며 의식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하진은 뭔가 놓친 게 없나 생각하며 집 안을 서성였다.


그러다 캠코더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의문의 택배로 받았던 그 물건. 이제는 대부분의 단서를 파일 영상으로 봐서, 구식 캠코더 자체는 별 소용 없어 보였는데….


혹시 저장장치 안에 아직 못 본 기록이라도 남아 있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이전에 확인했을 때, 재생 가능한 영상은 딱 하나뿐이었다. 72시간 뒤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 그리고 이미 그 ‘시간’은 지나갔으며, 결국 골목에서 더 끔찍한 현실을 보고 말았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살펴볼까.”


하진은 캠코더를 켜서 안을 들여다봤다. 오래돼서인지 반응이 느렸다. 화면에 잡히는 폴더는 1개, 파일도 1개. 추가로 감춰진 파일이 있는지 알수 없었다.


“음… 별다른 건 없어 보이네.”


혹시 기술적인 방법으로 ‘숨김 파일’을 풀어야 할지 고민하며, 전자제품 수리점 사장님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면 모를 전문 영역이겠지만, 또 부탁하기도 미안했다.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그때, 창밖에서 차 사이렌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찰인가?’


하진은 커튼을 살짝 열고 내다봤다. 길가에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 한 대가 지나갔다. 다행히 그냥 지나치는 듯했다.


“진짜 경찰이 곧 수사망을 좁혀올 수도 있어….”


‘F. Ko’ 시신이 발견되면, 근처 CCTV나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이 골목에 출입한 사람들을 추적할 거다. 그 중 한 명은 바로 자신. 어쩌면 곧 연락이 올지 모른다.


‘그렇지만… 경찰을 피해서 계속 달아날 수도 없잖아.’


머리를 싸쥐고 고민에 빠졌다. 이 지점에서 경찰에 자수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의식을 끝낸 뒤에 자수하든지. 어느 쪽이 옳을까?


의식의 시간은 다가오고, 경찰 수사도 임박했다. ‘또 다른 하진’은 언제 어디서 총을 겨눌지 모른다.


이 삼중고 속에서, 하진은 어떻게든 ‘봉인’을 시도하고, 가능하면 모두가 살아남는 길을 찾아야 한다.


사장님이 저녁 무렵에 준다던 ‘지하실 정보’를 확보해보면, 조금 더 윤곽이 잡힐 수도 있겠다. 준비할 장비나 대책도 필요해 보인다.


‘그때… 만일 또 다른 나들이 나타나면, 다치지 않고 제압할 방법이 있을까?’


삐-빅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낯선 번호였다.


[오늘 밤, 준비된 파일을 전하러 가겠다. - 대리인]


‘F. Ko’와 접촉시켜 준다는 그 ‘대리인’이 다시 움직이나 보다. 하지만 F. Ko는 이제 죽었다. 그럼에도 ‘대리인’은 무언가를 더 전하겠다고 한다. 아마 F. Ko가 남긴 자료나, 의식에 관한 마지막 메시지일 수도 있다.


“이제… 모든 조각들이 한곳에 모이려는 건가.”


하진은 긴장 속에서도 희미한 결심이 섰다. 어떤 폭풍이 몰려와도, 이제 끝까지 가야만 한다. 


‘사장님과 함께 지하실의 정확한 위치를 찾고, 대리인으로부터 마저 단서를 넘겨받은 뒤, 최후의 의식에 임하는 거야. 누가 죽고 사는지만이 결말은 아닐 거다. 그보단 더 큰 해법이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F. Ko’의 피 냄새를 씻어내고 싶었다.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자. 살인이 곧 답이 아냐.’


노트에 적힌 그 문장을 다시 되새기면서, 하진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창밖에서는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올라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하진에게 다가오는 현실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11월 27일… 운명적 새벽이 온다면, 과연 그 끝은 어둠일까 빛일까.




화, 목, 토 연재
이전 13화 13회. 어둠으로 이어지는 파일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