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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수니 Jan 28. 2021

딸은 엄마가 채운 노트를 기억한다

비싼 딸내미를 한글 세계로 이끄는 전략



지난해 말, 샨티 선생님이 하시는 발놀프로젝트(현 밝놀프로젝트) 2기에 참여해 발도르프식 한글놀이를 배웠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3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글자 형상화 작업을 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말하는 '에포크 노트'를 끝까지 채운 기념으로 표지 제목을 적고 있을 때 딸이 다가와 의미심장하게 말을 툭 건넨다.


"엄마 노트 다 채웠네?"


발도르프 학교에서 쓰는 에포크(주기집중수업) 노트. 발도르프 학교엔 교과서가 따로 없다. 아이들이 수업 때 이 노트를 직접 채워나가면 그것이 바로 교과서가 된다.



엄마가 파스텔과 크레파스를 부엌 테이블에 한가득 펼쳐두고 오랜 시간 끙끙거리며 그리고 있어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지켜보긴 했나 보다. 내가 진행하는 '떠수니 한글놀이 프로젝트'도 하고 있기에 발놀 미션은 쿨하게 나혼자 해왔다. 초반에 "태린이도 그릴래?"라고 나도 모르게 물었다가 아이가 엄마 마음을 읽어 버린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 이후로는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를 적자고 권하지 않았다.



가끔씩 들이밀까 싶다가도 욕심을 꾹꾹 참고 내 할 일만 해냈다. 엄마가 품은 욕심을 '일(1)'이라도 들키면 바로 도망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이니깐. 이놈의 가스나, 네가 글자를 알려달라고 조르지 않았니? (이런 이유로 한글 프로젝트를 어쩌다 대규모로 하게 되었다.) 아이가 글자에 관심을 가진 상태라도 내가 앞서 가면 안 될 일이었다. 참으로 비싼 딸내미다.



어쨌거나 나는 한글을 배우려면 발도르프 교육 방식으로 배우길 원했다. '발도르프식 한글 놀이'는 부모든 교사든 아이에게 전달해주기까지 정성이 필요하다. 글자를 무작정 읽고 쓰게 하지 않는다. 해당 글자가 들어간 단어들로 구성한 말놀이와 이야기를 들려 주고, 그 이야기에 맞는 형상화를 그려 제시한다. 몸을 깨워주기 위해 몸놀이도 함께 한다. 모음과 자음 진도를 빼기 전에 아이에게 한 글자씩 알려주기 전에 엄마인 나부터 글자와 친해지고 싶었다. 아이를 이끄는 방법을 다방면으로 익혀야 놀이로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가 마치고 미션을 완료한 사람에게 샨티 선생님이 정성 가득한 선물을 주셨다. 선생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천필통이었다. 엄마 필통이 예쁘다는 아이한테 한 마디만 했다.


"예쁘지? 엄마가 열심히 했다고 선생님이 주셨어~"


샨티 선생님이 3주 미션 완료 선물로 직접 만들어 주신 색연필과 색연필 가방



아이는 색연필 통을 가지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도 욕심부리지 않았다. 엄마가 얼마나 애를 써서 노트를 채운 줄 알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스스로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자기 노트를 꺼내 옆에 앉는다. "난 내 노트에 그릴래~" 영혼 없이 그리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이는 정성을 다해 글자 그림을 완성한다. 엄마가 며칠 동안 툭툭 던져 주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가 남긴 형상화. 차례로 ㅅ, ㅑ, •_ㅣ.



하하. 예상 적중! 내 전략이 먹혔다. 아이가 마음을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편이다.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 반응을 꾸준히 관찰하며 아이 스스로 마음을 먹는 타이밍을 노리느긋하게 너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아이가 쓸 노트 한 권도 따로 준비해 뒀다.


'엄마는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화상 수업을 자주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딸내미 노트북.




아이가 거부감 없게 글자를 만나는 것이 내 목표였으니 엄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주기만 해도 고맙다.


엄마 따라 매일 공부를 하고 잔다는 너,

엄마 따라 수업을 하고 잠든다는 너,

엄마 따라 자기가 맡은 수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너,

모든 모습을 아이는 지켜보고 있다.


미운 구석도 많은 엄마인데 엄마가 성장하는 모습을 예쁘게 바라봐주어 고맙다. 우리 그렇게 오래오래 함께 하자.


오늘도 즐겁게 글자 그림을 완성하는 딸. 참으로 아름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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