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정치학, 바깥의 정치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해방의 정치를 추구합니다. 대개 이러한 정치를 제도적 정치 바깥에서 찾고 있습니다. 현대의 제도적 민주주의는 되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지배 체계로 생각합니다. 시민들이 광장에 뛰쳐나와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과정은 사실 지배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지요.
윤석열 정권은 자유, 공정, 상식을 기치로 내걸고 당선되었습니다. 보편적 인권에 따른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강조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수구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국제적 스탠더드에 전혀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 사회적 불평등과 인권 탄압, 계층과 세대 등에 의한 사회적 갈등,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참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민주당과 진보정당은 근본적 해결에 있어서 무기력합니다. 단순히 상황적, 일시적 어려움만으로 해석하기엔 현대의 제도적 민주주의 체제의 구조적, 근본적 결함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제도적 정치의 한계점을 지적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죠.
그러나, 사실 촛불의 한계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의 제도적 민주주의는 허구성과 기만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유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 저항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총의가 모이지 않고 있으며,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이를테면 윤석열 퇴진, 정권 교체) 형태로의 변화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도권 정치의 문제점을 광장과 같은 외부에서만 해결하고자 한다면, 제도권 정치 내에서의 개혁의지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정치적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이 경우의 폐해는 오직 시민들이 떠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도적 정치와 바깥의 정치 (광장 정치)는 양립이 불가능한 형태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렇기에, 결국 저항의 핵심은 ‘국가’ 또는 ‘정치’ 뿐 아니라 ‘권력’ 자체에 집중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권력에는 다양한 장소,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필요합니다. 결국, 기존의 권력의 지배적 상태를 해체하고, 새로운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재구조화하는 과정으로써 저항과 투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도적 민주주의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하고, 권력관계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하는 ‘바깥의 정치’에 정당이 연대한다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이 존재합니다. 정당은 정당 나름대로 내부적 개혁을 통한 제도 개선을 이뤄내고, 대신 시민은 시민 나름대로의 저항을 일으킬 수 있는데 말입니다.
정당이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치가 지금 당장 사회를 변화할 힘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김건희 특검, 전세사기 대책, 사회적 참사 대책, 각종 민생 법안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노동 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수없이 많은 노동자를 보았습니다. 철탑 위에 올라가 단식 투쟁을 하는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노동자, 매일 수만 보를 걸으며 발이 피투성이가 되는 노동자... 원청은 교섭도 안 하고, 정부는 외면하니 ‘자해’ 형태의 투쟁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당장 현장에 갈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과 단 1시간만 이야기하더라도 투쟁의 이유를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자와 주무부처 공무원을 불러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해결을 위한 이슈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생겨납니다.
여의도 안의 관점과 여의도 밖의 관점은 확연히 다릅니다. 우리 미디어 환경의 문제도 있으며, 시민과 소통하지 않는 정치인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여의도 밖의 목소리를 듣고, 여의도 안의 관점과 치열한 토론을 통해 대조점을 찾고, 협의하여 방향성을 찾고, 결국 총의를 모아 투쟁 방향을 설정하면 될 일입니다.
결국 정당 정치인은 시민들이 모인 광장의 목소리를 듣고, 시민들 각각이 내는 목소리들을 엮어서 투쟁의 방향성을 설정해야 합니다. 그때 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을 낼 수 있고, 투쟁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요?
정당의 대학생 조직은 시대적 양심에 따라 지성의 방향을 설정해 온 선봉 조직이었습니다. 제도권 정치의 일부지만, 제도권 문법과는 전혀 다른 문법을 사용하며 시민과 함께해 온 조직이었습니다. 시민은 그런 대학생들을 신뢰로 보듬었고, 대학생 조직은 그 신뢰를 자양분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학생 조직은 제도권 정치의 문법과 다를 바 없어졌습니다. 유력 정치인의 라인을 타 그 속에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이 익숙해졌고, 시민의 언어와 결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탄핵’을 기점으로 들어왔다고 하나, 정작 ‘윤석열 퇴진’에는 무관심합니다. 야당이 되어서도 지지자들께서 말씀하시던 “여당식 정치”에 아직도 익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윤석열 퇴진을 위한 대학생 당원 연대를 구성했습니다. 연대 요청 링크를 만들고, 공유하자 순식간에 100명이 넘는 당원께서 연대와 참여 의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촛불 집회에서 발언했습니다.
민주당 전국 대학생위원회도 윤석열 퇴진에 그리고 공정과 상식이 넘치는 대한민국에 뜻이 있다면 우리와 함께 깃발을 들고 촛불을 들고 윤석열 퇴진을 외칩시다!
촛불 시민분들의 호응은 대단했습니다. 열렬한 응원과 반응에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도 있었습니다.
당원 모임을 구성하고, 촛불집회에서 발언한 후 약 2주 간 개인톡으로, 단체톡으로 이런 비판 내지는 비난들이 쏟아졌습니다. “당직자와 함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발언까지 나왔습니다.
지성의 방향에 따라 촛불을 들자는 당원으로서의 발언이 ’제 얼굴에 침 뱉기‘로 비쳤었나 봅니다. “더 가열차게 투쟁해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많은 채널을 통해 우리의 의사를 알리고, 동시에 메시지를 정제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커뮤니티에 저희의 의사가 알려지면서, 비판과 비난은 칭찬과 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지역 주민 분들께서도 “참 잘했다. 더 응원하겠다”며 연락을 주셨고, 행진 중에는 “발언 참 잘 들었다.”며 엄지척 해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언제나 혼자 가는 길은 아니란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양소영 전국대학생위원장이 촛불 현장에 나왔습니다.
윤석열 퇴진을 위한 더불어민주당 대학생 당원 연대의 공식 슬로건입니다.
전국대학생위원회를 촛불집회 현장으로 불러낸 원동력은 바로 촛불시민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을 기반으로 민주당이 개혁과 투쟁의 선봉이 될 수 있도록, 대학생 당원들이 ‘양심의 투쟁’을 지속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