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치 않은 주말의 소득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일요일 한낮, 외출하는 길에 마신 커피와 버스 안의 차가운 공기 덕분에 갈아타야 할 차가 바로 뒤이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건너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얼른 다시 나와서 다음 차를 탈 생각이었는데 환승 시간을 놓쳐 기본 요금을 내고 서울 시내의 파란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어요.
나에게는 찾아 다니며 먹는 음식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에 젤라또가 맛있다는 곳들을 다니면서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어디서든 못 보던 젤라테리아가 있으면 꼭 한 번 먹어보고 흔적을 남겨 놓고 있어요. 지난 일요일에 환승 시간을 놓치게 만든 것도 다름이 아닌 젤라또였습니다.
염두에 두고 갔던 카페가 있던 곳에는 공사장만 남아 있고 건물은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맞은편에 명동성당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었어요. 성물이나 관련 서적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도 화장실이 있겠다 싶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명동 성당 앞을 몇 번 지나가 보기는 했지만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빛이 내려오는 천장 아래에 앉을 자리도 마련되어 있고 그 광장 같은 공간을 둘러 상점이나 갤러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내판을 따라 가다 보니 커다란 글씨로 GELATO 하고 쓰인 간판이 있는 거여요! 날도 덥고 살짝 배가 고프던 차에 만난 너는 내 운명이다 싶어 두 가지 맛은 적어도 먹어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세레Essere 젤라또
에세레ESSERE라는 이름의 젤라또 집이었는데, 수제 유기농 젤라또라는 것을 보고 두 가지 맛에 5,000원이라는 가격이 납득이 되었어요. 큰 배스킨 라빈스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가 있어서 놀랐습니다. 고심 끝에 한 선택은 판타지아 에우로파와 그릭 요거트였습니다.
위에 얹어주신 것이 판타지아 에우로파였는데, 피오르디라테 속에 고소한 견과류가 꽤 많이 들어 있었어요. 보기에도 좀 묽어 보였지만 먹을 때에도 역시나 기대했던 쫀쫀함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베이스가 되는 젤라또의 맛 자체는 이탈리아에서 먹던 피오르디라테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맛있어서 녹기도 전에 금방 해치워버렸지요. 판타지아 에우로파의 맛으로 보건대 우유 맛이 기본인 다른 종류들도 전부 맛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릭 요거트는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밀라노의 멜라베르데에서 너무 맛있는 그릭 요거트 맛 젤라또를 먹고 와서 기준이 높아진 것일까요.. 진하고 단 맛이 적은 요거트 맛과 쫀쫀함을 기대했는데 에세레의 그릭 요거트는 젤라또보다는 오히려 소르베에 가까웠습니다. 시원하고 상큼하긴 했지만 우유 맛이 진한 젤라또를 기대한 나는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 버릴 수도 없는 것, 얼른 먹어버려야지 - 또 한번 빠르게 해치워버렸습니다. 케익 콘이 아니라 와플 콘이었다면 콘이라도 즐겁게 먹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수많은 다른 젤라또 집과 같았어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기대치 않은 젤라또는 큰 소득이었어요. 이탈리아식 젤라또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여서 좋습니다. 잘 먹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