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디자이너의 헤드폰 이야기
이번 리뷰 제품은 미국의 오디오 브랜드 GRADO의 SR125e이다. 헤드폰 자체는 GRADO 독자 개발 설루션인 SpaceBlack Polycarbonate로 제작되어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스피커의 우퍼 등에 사용되는 재료로서 소리의 공진음 흡수에 좋은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섬세한 각 저음 중음의 표현과 정확한 음악의 재현을 기대하며 리뷰를 시작해 본다.
SR125e의 사운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차가운 명쾌함이다. 해상도가 좋은 제품들은 저마다 고유의 성격을 하나씩 품고 있는데, SR125e는 음색의 온도가 차갑고 그래서 사운드의 명료함이 명쾌하게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SR125e로 음악들을 들어보면 가장 먼저 와닿는 사운드는 고음 대역의 선명함이다. 선율의 명도가 높고, 직진성을 한껏 품으며 넘치는 표현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에 지지 않는 저음부의 양감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 양감이 결코 저음을 둔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무게감을 덜어내어 탄력 있고 민첩한 저음의 움직임을 들을 수 있다. SR125e의 고음부와 저음부는, 비유하자면 매우 잘 관리한 날렵한 몸매를 가진 한 쌍의 커플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SR125e의 이런 멋짐 뒤에는 아쉬움을 주는 결핍도 있는데, 고음부의 선명함은 날 선 치찰음을 다 숨기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저음역대에서 곡 전체에 걸쳐 닻처럼 눌러주는 무게감이 아쉽고, 저음의 큰 주먹으로 타격한 뒤에 남는 공기의 흔들림이 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SR125e 사운드의 특징 내지는 명쾌함이라는 똑 떨어지는 고유함을 형성하기도 한다. 온기 감이 덜한 선율이기 때문에 윤기가 넘치지는 않지만, 차갑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선율과 리듬의 움직임을 들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정신이 맑아지는 해상력으로 음악을 감상하게 된다. 그리고 오픈형이 주는 탁 트인 공간의 통풍감과 스펀지로 만들어진 이어 패드의 온기감이, 마치 단짠의 조화처럼 절묘한 궁합이 되어 준다. 이제 이와 같은 SR125e가 들려주는 각 스테이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드보르작의 피아노 5중주 2번 op.81은 드보르작의 성숙한 음악 시기에 작곡된 작품으로서, 프라하의 남쪽 시골 마을 비소카의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만들어진 수작이다. SR125e는 제 1바이올린의 애잔함을 극치로 끌어올리며 드보르작 특유의 애수 섞인 선율로 마음을 칭칭 감아버린다. 첼로의 중후하고 넘침 없는 행보 역시 신사적이다. 풍미 넘치며 낮게 흘러나오는 선율이 사운드 공간의 구석구석을 메워 주듯 차오르게 해 준다. 비올라의 내성적이지만 강직한 특성은 첼로의 저음 선율과 함께 흐르며 곡의 무게를 더해주기도 한다. 또 바이올린의 고음 선율과 함께 하면서 날카로움을 마모시키고 현악 4중주의 평화를 도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며 선두에 서기도 하고 뒤를 봐주기도 하는 피아노 선율의 유려한 움직임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아름다운 조합을 SR125e는 맑으면서도 명료하게 담아낸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이다. 드보르작 2악장의 슬프고 외로운 선율들에 건조함을 더하주며, 스산한 11월의 초겨울 바람에 외롭게 걷는 나그네를 연상하게 하듯 찬 기운을 더하는 SR125e이다. 냉랭해지려 하는 겨울 자락에 이 스산함이 너무 멋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지난 가을부터 여전히 푹 빠져있는 쇼팽 콩쿠르 영상들 중 콩쿠르 1위 우승자인 Bruce liu의 공연 영상들을 SR125e로 함께 해 보았다. 콩쿠르 현장에서는 경연자마다 선호하는 음색이 다르기 때문에 몇 대의 피아노 중에서 원하는 피아노를 골라서 연주하게 되어 있는데, Bruce liu는 FAZIOLI라는 피아노로 경연을 했다. 이 브랜드의 피아노는 고음부가 낭창낭창하고 눈부신 소리가 일품인데, 고음역대가 좋은 헤드폰/인이어 제품들로 들으면 공기 중에서 부서지는 그 화려한 고음 선율의 분수쇼를 즐길 수 있다. SR125e는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이 원하는 사운드를 만들어줄 정도로 제격인 제품이었다. 저음역대에 너무 무겁거나 과하지 않은 정돈됨이 있고,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사랑스럽고 유려한 움직임으로 노래하는 고음역대의 선율들을 능수능란하게 들려준다. SR125e로 듣는 쇼팽 콩쿠르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폴란드의 11월의 기온을 느끼며 오롯이 음악이 주는 따뜻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SR125e와 보컬의 만남은 어떨지 들어보았다. 개인적으로 SR125e는 중저음역대 가수의 음악에 더욱 잘 맞는다. 고음역대가 시원하게 직진하는 SR125e이기 때문에, 오히려 중저음역대 가수의 음악적 표현을 꺼내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라는 계산에 의해서이다. 고음역대가 좋은 제품으로서 고음역대 가수의 음악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나은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SR125e를 들으며 연신 상상이 되던 장면이 있다. 눈 내리는 겨울날, 설경을 내다보며 노천탕에서 온천을 즐기는 기분을 떠올렸다. 온몸은 편한 온도의 온천물 속에서 계속 데워지고 있고, 차가운 공기로 인해 물 밖에 있는 머리는 더욱 맑아지며 빨갛게 시린 코끝과 귀 끝은 되려 시원한 느낌으로 얼음바람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매해 겨울이면 이런 휴식을 자주 상상하며 겨울의 맛을 보는 로망을 품고 있는 필자로서는, SR125e 덕에 잠시 자유로운 여행 체험을 했다.
SR125e의 이어 패드 부분의 스펀지는 따뜻한 온천물처럼 귀를 따스하게 감싸주고, 사운드의 선율은 온천을 하며 즐기는, 찬 바깥바람 마냥 날아다닌다. 삼한사온이 아니라 삼한사미라는 신조어를 들었다. 3일은 춥고 4일은 미세먼지가 기승이라는 말이란다. 그래서 지켜보니, 정말 빠짝 추운 3일이 지나면 미세먼지가 매우 좋음이다. 찬 공기가 선사하는 맑음의 기분이 마음도 맑게 해 준다. 추운 건 싫지만 찬 기운이 만드는 맑음은 좋다. SR125e의 기분 좋은 맑음은 분명 겨울을 닮았다. 그래서 필자는 SR125e의 사운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차가운 명쾌함이라는 결론이다.
https://gradolabs.com/headphones/prestige-series/item/129-sr12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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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 이미지는 제조사 상품 페이지와 본 글의 기고 매거진에서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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