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취미에게 바치는 헌정글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슬램덩크라는 만화를 접하게 되면서 농구의 매력에 푹- 빠졌다. 슬램덩크에 나오는 인물들 한 명 한 명이 다 너무 매력적이었지만, 그보다 '농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매료돼버리고 말았다. 짧은 시간, 코트를 수십 수백 번 전력 질주하고, 빠르게 공격과 수비를 전환해 득점을 이루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희열감이 느껴졌다.
어린 나는 슬램덩크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드리블은 어떻게 하는 건지, 슛은 어떻게 쏘는 건지 모르지만, 그냥 일단 나가서 공을 튀겼다. 그러다 보니까 "백보드를 맞추면 슛이 들어가는 거구나" "공을 튀길 땐 자세를 낮춰야 하는 거구나" 등의 배움을 하나씩 체득했다. 그리고, 이제는 남자애들 사이에 부대껴서 골을 몇 번 넣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 처음으로 해외 유학을 떠났다. 솔직히 그때는 영어를 1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용기로 유학을 가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다. 의사소통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바디랭귀지를 열심히 구사해봤지만 유학 시절 초반엔 학교 수업에서는 정말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당연히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려웠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말이 통해도 친구가 되는 건 어려운데, 나처럼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은 더 친구 만드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의 돌파구가 되어준 게 바로 '농구'였다.
농구는 영어를 못해도 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나름 초딩 길거리 농구 짬밥이 있던 나는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농구팀을 찾아 나섰고, 다행히 학교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양애들은 나보다 체격도 훨씬 크고, 여자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이런 스포츠를 즐겨하다 보니 농구도 훨씬 잘했다. 나도 한국에서는 나름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은 확실히 클래스가 달랐다.
농구팀에 조인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매일매일 학교 끝나고 훈련을 하고, 한 팀으로 움직이니까,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당시 농구팀에 외국인은 내가 유일했고,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친구들의 부모님들까지 나를 잘 챙겨주셨다. 덕분에 나는 건강한 몸도 얻고, 영어도 배우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스트레스까지 풀게 되었으니, 농구가 내 유학 생활을 구제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저 때부터 지금까지 농구를 꾸준히 했으면 지금쯤 농구를 엄청나게 잘했겠지만, 아쉽게 중간에 농구를 못 한 텀이 꽤 길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는 학교 규칙 때문에 농구 경기를 뛸 수가 없었고, 대학교에 올라가니 주변에 여자 농구팀이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농구와 또 한 번 멀어졌다.
대학 생활 중, 인간관계에 현타를 받고 삶이 피폐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조금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일단 학교 밖으로 벗어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보스턴 한인 농구팀'을 검색했다. 농구에 대해서는 항상 좋은 기억밖에 없었으니까. 다행히 한 팀이 있었고, 발견하자마자 바로 모임에 참석했다. 다행히 모두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주로 주말 저녁이나 아침에 모여서, 2-3시간 농구를 열심히 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 아주 생산적인 일정이었다. 우리 학교는 경영대 온리라서 대부분 나와 비슷한 백그라운드의 사람들이었고, 이 들에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는 음대 사람들, 공대 사람들, 예대 사람들 다양한 배경과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택진이, 열이 오빠, 준원 오빠, 체리 언니, 인혜 언니 등 팀 사람들이 잘 챙겨준 덕분에 금방 팀에 적응할 수 있었다. 운동하면 가장 좋은 점은 사람들이랑 정말 빨리 친해진다는 것이다. 이 팀을 조인하게 되면서,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고 의지할 사람들이 생겨서 정말 감사했다. 덕분에 힘들었던 보스턴의 생활도, 아직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졸업 후엔 샌프란시스코로 왔는데, 여기서도 같이 농구할 사람 찾는 게 제일 힘들었다. 남자들이랑 하면 되는데, 사실 남자들이랑 하면 걔네도 재미없고 나도 별로 재미없다. 서로 신경 쓰면서 플레이를 하게 되니까. 그래서 한참 동안 농구를 잊고 지내다가, 샌프란시스코 4년 차가 되어서야 여자 농구 리그를 알게 되어 찾아갔다.
퇴근 후 매주 월요일마다 경기가 있는 힘든 일정이었지만 나름 또 설레었다. 동네 특성상 전부 IT 회사 다니는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완전한 나의 오산이었다. 마트 캐셔, 유치원 교사, 대학생, 식당 알바, 음향 프로듀서 등 생전 처음 보는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이었다. 난 사실 이 동네 와서 IT 이외 분야의 친구들을 처음 만나다 보니까 그게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일부러 동선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매번 굳이 집에 내려다 줬다. 이 친구가 살아온 삶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어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 친구가 궁금해서. 이 친구는 스타트업이 뭔지, 벤처캐피털이 뭔지, 마케팅이 뭔지 몰랐는데, 그게 당시 나에겐 좀 충격(?)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동안 버블 안에 갇혀있었구나. 세상을 스타트업과 비 스타트업으로만 참 편협하게(?) 바라봤구나 반성했다. 이렇게 농구는 매번 내게 끊임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다 최근 SBS에서 시작한 핸섬 타이거즈라는 농구 예능을 보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동안 잔잔했던 농구에 대한 나의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날 온종일 농구에 관한 영상을 챙겨보다가, 거기서 끝나고 싶지 않아서 서울에 있는 여자 농구 동호회들을 열심히 검색했다. 초등학생 시절, 그냥 운동장으로 나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모임을 찾아서 그냥 나갔다.
잠시 한국에 나와있던 거였지만, 주말 한 번만 하기엔 아무래도 아쉬울 것 같아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모임이 있는 곳을 찾아 각각 가입했다. 토요일엔 주토피아, 일요일엔 바투까지. 소중한 주말이지만, 주말 약속은 잡지 않는다. 농구만 해도 부족한 시간이니까.
첫 모임은 주토피아라는 농구 동호회를 찾아갔는데 진짜 가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5:5 게임을 했는데, 주토피아 정회원이 한 팀, 그리고 나를 포함한 게스트들이 한 팀이 되어 대결했는데, 결과는 처발렸다. 게스트로만 이루어진 우리 팀은 다들 처음 만난 사이다 보니 상대 팀에 비해 호흡이 미흡했다. 상대 팀은 속공을 통해 득점을 너무나도 쉽게 올렸다. 일단 리바운드 잡으면 무조건 냅다 뛰었다.
이게 무서운 이유가 뭐냐면, 드리블 한번 없이 패스 한 번으로 슛에 바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이런 좋은 패스는 제일 빨리, 멀리 달리는 사람에게 날아간다. 그리고, 득점으로 바로 연결시킬 수 있는 이런 기회는 가만히 있는 자에겐 절대 오지 않는다. 무조건 뛰어야만 잡을 수 있는 기회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제자리에서 그저 기회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에겐 좋은 패스가 오지 않는다.
여하튼 이 날, 점수는 처발렸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슛을 쏘고, 수비도 적극적으로 하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까 득점할 기회가 계속 생겼다. 풀코트로 뛰다 보니 몸도 힘들고, 다리엔 멍투성이지만, 이런 건 득점의 맛과, 땀 흘리는 맛으로 다 상쇄되니까 괜찮다! 이렇게 생긴 자신감은 즐거움이 되어 나를 또 체육관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최근 3주 내내 주말마다 농구 동호회를 찾아가다 보니, 이제는 얼굴이 익숙한 사람들이 생겼다. 나는 게스트로 참여하기 때문에 정식 팀원은 아니지만, 나와 같이 게스트로 참여하는 친구들과는 확실히 좀 더 편해졌다.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들과 함께 즉흥적으로 즐긴 한강 야외 농구다. 농구 동호회에서 유독 친해진 수연이와 함께 낮에 나들이를 갔다가, 저녁에 농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같이 한강으로 향했다. 사람이 더 많아지면, 재밌을 것 같아서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무작정 연락을 돌렸다. 오후 5시 30분에 연락했는데, 저녁 7시 30분이 되었고, 농구에 미친 여자들이 무려 8명이나 모였다-! 몸이 근질근질했던 사람들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한강의 밤은 낭만적이었다. 강 너머로 보이는 남산, 고층 빌딩의 불빛들, 그리고 아스팔트 코트 위에서 몸을 부딪히며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모습이 참 좋았다. 농구할 때만큼은 내가 누군지 잊고, 그 상황에만 몰입할 수 있어서 좋다. 득점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빠르게 판을 읽고, 서로 콜을 하며, 스크린을 걸어준다. 농구는 팀플레이다. 두 시간 뛰고 나면, 굳이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게임이 끝난 후, 한강 라면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오늘 하루도 참 잘 보냈구나' 하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취미를 갖는다는 것
중학생 때 유학을 온 내가, 가장 어렵지 않게 미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운동을 취미로 가지고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농구라는 팀 스포츠를 통해, 영어라는 장벽을 넘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장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농구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난 농구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