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을 만나다
2011년 10월 말...
멜번에 도착한 지 어언 한 달.. 한 달 동안 멜번에 정착하기 위해서 꽤 많은 노력을 했다.
큰애는 집 근처 초등학교에 10월 초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유치원을 다닐 때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한국나이 8살-만 7살짜리 꼬마가 얼마나 영어를 알까? 학교를 보내며 'toilet'이라는 말만 잘 얘기하라고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잘 얘기했단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손을 번쩍 들고는, "I am toilet."이라고 했다고.. 하나도 못 알아듣는 영어로 하는 수업을 하루 종일 멍하니 듣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물론 몇 해가 지난 지금은 나보다 영어를 잘 한다.(ㅠ.ㅠ)
정착 초기, 돈을 넉넉하게 가져오지 못했던 우리는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차 없이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큰애 학교까지 15-20분, 쇼핑센터까지 10-15분, 기차역까지 15분, 도서관까지 10분 정도를 매번 걸어다녀야 했다. 나와 아내야 어른이니 걷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12살이 안 된 아이들을 집에 보호자 없이 방치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들었기에 쇼핑을 하러 갈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했다. 하정이(큰 딸)는 나름 씩씩하게 걸었지만 하진이(작은 딸)은 4살 밖에 안 되어서 걷는 게 힘들어서 매번 업어주던지, 목말을 태워줘야 했다.
나도 10월 초부터 랭귀지 스쿨에서 영어를 배운다. 학교는 시티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기차를 타고 시티로 다녀야 했다. 멜번에서의 둘째날 있었던 차내 전광판 고장은 그 뒤로는 한 번도 못 봤다. 학교가 끝나면 동네 도서관에서 저녁까지 영어공부를 한다. 주말에도 도서관에서 하는 프리토킹프로그램인 conversation circle에 나가서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호주인 진행자와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과 대화를 한다. 일요일에는 듣기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버스와 트램을 타고 1시간 40분이 걸리는 호주 교회에 가서 저녁예배에 참석한다. 물론 거의 못 알아들었다.(ㅜ.ㅜ)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의 모나쉬대학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면 5-6분이면 가는 거리지만 시간도 많고(?) 돈을 아껴야 했던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걸어가기로 한다. 걷기에는 꽤 먼 거리여서 약 40분이 소요될 예정이다.
도서관에서 나와서 하늘을 봤는데 하늘 저편에 시커먼 구름이 벽처럼 서있는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속으로 '우와! 구름이 정말 희한하게 생겼네.'라고 생각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길을 나선다. 약 10여 분쯤 걸었는데 지나가는 버스정류장에 서있던 호주사람이 말을 건다. 영어라서 살짝 긴장을 한 채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봤더니 난데 없이 "토네이도가 오고 있어. 지금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어."라는 약간은 황당한 이야기다. 그래서 하늘을 봤더니 좀전에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봤던 시커먼 구름벽이 거의 머리 위로 다가와 있다. "어, 알려줘서 고마워."라고 대답한 뒤 발을 재게 놀려서 약속장소로 간다.
그런데, 2-3분 뒤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엄지손가락만한 빗방울이 후두둑도 아니고 와다닥하며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거의 45도 각도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지 10초도 안 되어서 나는 "이 비를 계속 맞는다면 죽을 수도 있겠다."라고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다급한 마음에 바로 옆에 있는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처마 밑에 섰는데 비스듬히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집 문을 두드린다. 평소의 내성적인 나라면 절대로 모르는 사람 집 문을 두드릴 생각을 못하겠지만 이 살인적인 빗줄기는 염치고 뭐고 다 내팽개치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는 집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흔쾌히 들여보내 준다. 그리고는 홀딱 젖은 내게 따뜻한 차를 대접해 준다. 이것저것 얘기하다보니 Conversation Circle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아저씨와 친구이다. 이런 우연이....
30-40분을 그 집에서 비를 피하니 비가 잦아든다. 이미 약속했던 사람과 통화해서 약속은 취소했다. 비가 그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 길을 나선다. 물론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계속 했다. 거의 생명의 은인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문 밖으로 나와서 신발을 신는데 처마 밑에 벗어놓았던 신발에는 빗물이 가득 차있다. 물을 쏟아내고 신을 신고 돌아오는데 걸을 때마다 신발에서는 찰박찰박 소리가 난다.
그날도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