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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nam Kang Oct 13. 2020

흑인만 고용할래

뉴욕 메이저 갤러리, '데이비드 즈와이너'의 새로운 실험

9월 27일 뉴욕타임스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데이비드 즈와이너(David Zwirner)’라는 뉴욕 첼시의 갤러리가 내년 봄 오픈 예정인 새 분점에 오로지 흑인만 채용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참고). 이 갤러리의 오너 데이비드 즈와이너(56)는 흑인 여성 에보니 헤인즈(Ebony L. Haynes)를 디렉터로 고용, 그녀에게 전권을 부여해 새 갤러리 스탭을 흑인으로만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데이비드 즈와이너 갤러리의 새로운 시도를 알리는 뉴욕타임스 기사


뉴욕의 갤러리스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금발의 백인 여성이다. 예전에 ‘앤디 워홀 손 안에 넣기’(리처드 폴스키, 마음산책)란 책을 재밌게 읽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화상(畵商)인 저자가 앤디 워홀 그림 한 점을 사기까지 뉴욕의 미술 시장에서 겪은 일들을 가감 없이 서술한 책인데, 이 책에 묘사된 뉴욕 업타운의 갤러리 풍경은 이렇다.      


“도와드릴까요?”

돌아보니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의 갤러리 리셉셔니스트였다. 20대 중반쯤 돼보이는 잘 꾸민 젊은 여자로, 금발 머리를 뒤로 묶고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스웨터 위로는 한 줄짜리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얼굴에서는 차가운 경멸조의 표정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리처드 폴스키, ‘앤디 워홀 손 안에 넣기’, 38쪽     


폴스키는 갤러리 대부분이 명문대를 갓 졸업한 백인 여성을 갤러리스트로 고용하며, 보통은 최고 고객의 딸인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들은 드디어 미술계로 입문한다며 좋아라하며 갤러리스트가 되지만, 금세 따분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갤러리에 온 손님들을 깔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폴스키는 주장한다.


물론 모든 갤러리스트가 이렇진 않을 거다. 나는 폴스키 때문에 무시당할까봐 걱정돼 상업 갤러리 들어가기를 주저했었는데, 2017년 여름 로스앤젤레스 비버리힐즈에서 상냥한 갤러리스트를 만나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다. 엄마, 이모와 비버리힐즈 구경에 나섰다가 제프 쿤스의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를 지나게 됐다. “엄마, 이모, 이 작가 되게 비싼 작가다. 이 사람 작품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도 있어” 하고 우리 셋은 나란히 서서 윈도우 안을 들여다봤다. 미국 최고의 갤러리로 꼽히는 가고시안 갤러리였다. 그때 갤러리 문이 열리더니 갤러리스트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헤이, 들어와서 구경하세요. 어서요.” 그녀 덕분에 제프 쿤스의 Gazing Ball 시리즈와 발레리나 작품 등을 즐겁게 둘러봤다.


이후 용기(?)가 생겨 종종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가곤 했는데, ‘그림 살 돈도 없으면서…’ 하는 눈초리를 받아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폴스키 말이 옳았다. 갤러리스트 대부분은 백인 여성이었고, 또 금발인 경우가 많았다.      




흑인 작가는 있어도 흑인 갤러리스트는 드물어


[pixabay]


데이비드 즈와이너는 독일 출신으로 예술품 컬렉터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상업미술계에 입문한 인물이다. 1993년 뉴욕 소호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를 처음 오픈했고, 이후 착실하게 성장해 가고시안에 필적하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가고시안의 전속작가였던 제프 쿤스와 쿠사마 야요이를 자신의 갤러리 전속작가로 영입해 대단한 화제를 낳은 적도 있다.


지난 5월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후 흑인인권운동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가 미 전역으로 확대됐다. 누적된 흑인 차별에 더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이 맞물려 흑인들의 분노가 거세게 분출됐다. 여름이 지나면서 시위는 거의 사라졌지만, 흑인에 대한 지지 운동은 여러 형태로 바뀌어 나타나는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흑인 소상공인을 돕자는 운동이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소상공인이 경제적 타격을 입은 가운데 흑인이 백인에 비해 정부 지원이나 금융 대출 등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흑인이 운영하는 상점, 식당(Black Owned Business)에서 소비함으로써 그들을 돕자는 운동이다. 실제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이후 흑인 소상공인 중 40%가 사업을 접었다고 한다. 한 예로 식당 리뷰 앱 ‘옐프’는 흑인이 운영하는 가게 목록을 제공한다. 페이스북은 10월 30일부터 두 달간 금요일마다 흑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소비하자는 #buyblackfriday 캠페인을 벌인다(참고).


즈와이너의 '흑인 고용'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시작은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보인다.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가 폭발하기 전인 올 1월, 즈와이너는 헤인즈에게 자기 갤러리의 디렉터로 와달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헤인즈가 오로지 흑인 스탭으로만 구성된 쿤스트할레(kunsthalle·일시적 기획 전시를 위한 공간) 아이디어를 즈와이너에게 설명했고, 이에 즈와이너는 아예 그녀에게 독립된 갤러리과 갤러리 운영에 대한 자율권을 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즈와이너는 “예술가 측면에서는 (인종 문제와 관련해) 진보가 이뤄졌지만, 고용 측면에서는 부끄럽게도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헤인즈는 즈와이너 갤러리에 합류하면서 “상업 갤러리에서 흑인이나 유색 인종이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다.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녀는 앞으로 흑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유급 인턴 프로그램도 도입할 생각이다. 새 갤러리는 내년 봄에 개장한다. 위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1980년대 장 미셀 바스키아가 일약 스타로 도약한 이후 오랫동안 그 뒤를 잇는 흑인 예술가는 배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술 경매 시장에서 높은 값에 낙찰되는 흑인 작가의 작품이 속속 등장하면서 흑인 예술이 다시 부상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업계 구성원으로 보자면 흑인 파워는 극히 미미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전미아트딜러협회(Art Dealers Association of America)의 176명 회원 중 흑인은 딱 1명이다(참고).

      



화가가 그린 코로나 시대


엄청 잘 나가는 갤러리가 사회 개선에도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호감이 생겨 데이비드 즈와이너 갤러리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즈와이너 갤러리는 뉴욕 첼시에 두 곳,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한 곳, 그리고 런던, 파리, 홍콩에서 각각 1개의 갤러리를 운영한다. 미리 홈페이지에서 어떤 전시를 하는지 살펴봤는데, 두 개의 전시가 마음에 들었다. 첼시의 19번가 갤러리에서 열리는 해롤드 엔카르트(Harold Ancart, 40)의 ‘여행의 빛’(Traveling Light), 그리고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 열리는 조쉬 스미스(Josh Smith, 44)의 ‘유령(Spectre)’ 전.





첼시 19번가 갤러리의 문을 열었다. 리셉션 직원이 약속하고 왔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No Problem!”이라며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물어봤다. 갤러리 손님은 나와 다른 여성 둘 뿐이어서 한가롭게 그림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벨기에 출신으로 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엔카르트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무 데도 여행갈 수 없는 시절에 여행에서 만난 순간을 그렸다. 산, 바다, 숲의 나무. 세 점의 산과 세 점의 바다 연작을 서로 마주보게 걸어놓은 전시 공간은 아름다웠다. 산 쪽으로 바짝 붙어서야 바다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고, 또 바다 쪽으로 바짝 붙어서야 산 그림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작가가 프랑스 숲을 여행하다 이 각도로 그려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나무 그림은 나무 가까이에 섰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나무를 그린 그림이다. 캔버스 가득하게 채운 튼튼하고 풍성한 나무가 듬직했다.


작가는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시절에 그림을 통해 여행하는 경험을 누려보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산 그림에선 애리조나, 나무 그림에선 요세미티 여행을 떠올렸다.


그리고 딱히 여행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딱 한 점의 그림이 전시됐는데, 나는 이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흰 페인트 칠을 한 어느 집의 담벼락을 그린 그림이었다. 작은 창문 하나 달린 벽, 그리고 그 아래 화단이 있다. 이 풍경은 서울의 우리 동네를 생각나게 했다. 낡은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 동네에서는 창문을 열면 바로 옆집이 보인다. 여행의 끝은 집으로 돌아오는 거니까, 싶었다.


이틀 후에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갤러리로 갔다. 이 갤러리는 일반 주택을 개조한 공간이라 맨해튼 부잣집 구경하는 기분도 들었다. 역시 미리 약속하지 않았기에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고 입장했다.




조쉬 스미스는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미국 작가다. 루이비통이 그와 콜라보레이션한 제품을 내놓은 바 있으니 아주 잘 나가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 역시 팬데믹 시대를 그렸다. 전면 이동 제한으로 사람이 사라진 브루클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가는 새벽과 한밤에 동네 산책을 하면서 고요함과 깨끗함에 고무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전 작품들보다 색감이 더 밝고 화려하고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맨해튼보다는 키 낮은 건물들이 주르륵 이어진 브루클린 모습도 친근하다.

 

내 인생의 짧은 뉴욕 시절을 기념하며 한 점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셉션 데스크를 지키는 직원에게 가격을 물어봤다. 큰 사이즈(213.4 x 182.9 cm) 작품은 우리 돈으로 3억 원 가량. 흐억, 하고 놀라니까 런던에서 작은 사이즈(152.4 x 122.2 cm)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건 2000만 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다 팔려서 살 순 없다고.


즈와이너 갤러리의 새로운 시도와 별개로 이 두 전시는 찾아가볼 만했다. 코로나 팬데믹은 전 지구에, 각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변화를 가져왔다. 젊은 화가들에겐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시안, 코리안 갤러리스트로 확대되기를


갤러리 구경이 좋은 점은 그 안에 사무실도 있어 갤러리스트들이 일하는 모습도 간간히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군데 즈와이너 갤러리에서도 몇몇 직원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예외 없이 백인이었다. 백인 여성이 대부분이었고, 백인 남성도 두어 명 있었다. 갤러리스트들을 유심히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인종 외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다들 외모가 뛰어나고 살찐 사람은 없었다. 미술 시장이 곧 비주얼 비즈니스여서 그런 걸까.


새 갤러리에 흑인만 고용하겠다는 것이 사회 정의를 위함인지, 아니면 흑인 예술가와 흑인 컬렉터를 유치하려는 사업적 전략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의든 간에 미술시장에 인종 다양성이 더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흑인 갤러리스트에 이어 아시안, 코리안 갤러리스트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기에. 즈와이너의 신임 디렉터 헤인즈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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