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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언 Jan 12. 2022

편견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힘

<아빠가 사랑한 육아 5>_모든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려면 관객은 모르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겹겹이 쌓여야 한다. 누군가는 스토리를 쓰고, 누군가는 섭외를 하며, 누군가는 투자자를 찾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장소를 발견한다. 연출부와 촬영부가 오로지 촬영에만 집중하고 매일의 스케줄이 제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이들이 있다. 가정에도 모두가 제자리에서 오로지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이가 있다. 영화에 제작부가 있다면, 가정에는 주부가 있다.

잘 보이지 않는 두 곳에서 열정을 불사르며 영화 제작사를 운영하는 육아하는 아빠 김상범 대표를 만났다. 


김상범 대표는..

<귀천도>와 <초록물고기>의 제작파트스탭으로 영화일을 시작했고, 2014년 전주국제영화제 독립 장편 무비꼴라쥬 수상작 <마녀>와 다수의 독립영화를 제작 및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현재 흰수염고래영화사를 운영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시간 조율에 여유 있는 직업의 특성상 두 아이의 양육을 도맡아 해온 전담 육아 아빠다.


 과거의 오늘 

“페이스북에는 ‘과거의 오늘’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매일 아이들의 사진이 뜹니다. 지금 중학 1학년과 초등 6학년이 된 아이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시시때때로 보여주죠. 손들고 벌서던 모습, 여행지에서의 모습들, 장난치는 모습을 보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며칠 전 큰 아이를 혼내고 어떻게 풀어주나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5년 전 술래잡기 놀이하던 영상이 뜬 거예요. 울고 있는 아이를 불러 같이 보면서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니까 자연스럽게 풀리더라고요.” 


추억의 힘은 대단하다. 멋지고 유명한 곳을 찾아간 것도 좋지만 일상의 즐거운 기억들이 더 행복한 건 매일매일 아이들과 나눈 추억 덕분이다. 나는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행복하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도 그때의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 몸 어딘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지리산 노고단에 가족들과 다녀왔습니다. 둘째가 꼽은 가장 좋았던 순간은 정령치 데크에 누워 이야기 나누며 별을 본 것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사실 이야기 나눌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특히나 중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는 치열한 사춘기를 보내는 중이라 더욱 이야기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뭔가 이슈를 만들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소통하고자 떠난 여행이었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좋아해 주었어요. 시간이 또 흘러 몇 년 후 과거의 오늘에 이 이야기도 나오겠죠. 그때 또 추억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나눌 생각하면 벌써 기분이 좋습니다.” 


육아 골든타임이란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며 제때 꼭 해주고 넘어가야 하는 최소한의 시간을 말하는데, 아이와의 골든타임은 길지 않다. 그래서 아이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사춘기가 되면 많은 아이들이 말문을 닫고 방문도 닫아버린다. 그때가 오기 전에 부모가 준비하고 있어야 험난한 사춘기를 비교적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 함께 해주고 언제나 부모가 그 자리에 있음을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해주자. 


“시간만 나면 휴대폰을 바라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최대한 밖으로 나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별을 보러 또 가고 싶지만 이제 중학생이라 힘들겠다고 걱정하는 아이에게 네가 원하면 언제든 데리고 가줄 수 있다고 말해주었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원할 때 당장 함께 해줄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을 준비해두는 것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육아 분담의 기준은 누가 세우죠? 

“촬영이 있거나 미팅이 있을 때 빼고는 출퇴근이라는 개념이 없는 직업이다 보니, 저희끼리는 ‘직업은 있는데 직장이 없다’고 말합니다. 워낙 밤샘 작업도 많고 불규칙한 일정이 많아서 잠깐 자고 충전되듯이 컨디션 조절이 가능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날 때도 중요한 순간에도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육아는 체력이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아이를 낳으면 덜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두 시간마다 깨는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거나, 낮과 밤이 바뀐 아이를 달래 재우고, 체력 좋은 아이들과 몸 놀이를 즐기는 것 또한 부모의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출산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는 엄마들에게서 들어봤는데 건장한 아빠에게 들으니 좀 생소하지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는 이야기니까.


“결혼 전에 직접 살림에 관여해본 적은 없지만, 동생 부부의 직장 사정으로 저희 본가에 맡겨진 조카를 몇 년 돌본 적이 있습니다. 결혼 전이라 육아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기보다, 어머니가 돌보시는 조카를 가까이에서 보며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어요. 저는 어머니가 부탁하시는 체력이 필요한 부분을 적극 돌봤는데, 이제 성인이 된 조카가 여전히 가장 따르는 가족이 저라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그 경험이 두 딸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결과적으로 그는 결혼 전 어깨너머로 육아를 경험해봄으로써 현실 육아의 어려움을 짐작했을 것이다. 막상 내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을지라도 아이가 자라는 내내 그에게 육아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는 3교대 대학병원 간호사입니다. 밤샘 근무나 새벽 출근도 주기적으로 있어, 저희 집 사이클은 아내의 업무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역할을 요구하기도 어려웠지만, 결혼 후 겪어본 아내는 집안일에 능숙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저는 요리도 금방 익숙해졌고, 몸을 움직이는 집안일이 별로 힘들지 않더라고요. 육아와 살림에 대한 역할분담의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가정마다 상황이 있고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데 기준을 정하고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랜선 집들이가 생기고, 집안 정리를 도와주는 TV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시대지만 관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가 집안을 꾸미고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리 만무하고 그쪽에 관심이 없다고 큰일이 생기지 않는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혹은 효율성에 따라 모두가 다른 역할 분담이 있을 수 있다. 육아 분담과 역할 분담에 대한 질문을 해대는 필자의 모습이 머쓱해졌다.


“결혼 초에는 저희도 역할 문제로 충돌이 있었어요. 저는 눈에 보이면 바로 치워야 하는 스타일이고 아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맞춰보지도 않고 주변의 이야기를 듣거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대로 역할분담을 해두고 서로에 대해 기대를 한 거죠. 그러다 둘 중 누군가 많이 하다 안 하면 서운함이 생기게 됩니다.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하기 마련이니까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수다. 많이 대화하고 이해하는 과정 없이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은 부부 관계를 더욱 힘들게 하고 만다. 서운한 것은 서운한 대로, 고마운 것은 고마운 대로 표현하고 서로 인정하는 과정이 있어야, 출산 후 더 힘든 상황이 닥쳐도 부부가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다.  

Photo by Young-Kyung Kim on Unsplash


 편견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힘 

“아이들이 태어나고 제가 육아를 전담하게 되면서 아내는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고, 저는 오랜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제 아이들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언제나 함께 있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런 저의 마음과 상관없이 주변의 시선은 따갑게 다가왔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시선들이 불편했고 위축되어 과민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렇게 느끼는 내 감정이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사회적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의식하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이 문제들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결혼은 했는가, 아이는 낳을 것인가부터 육아는 누가 하고, 경제활동은 누가 하는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들에 타인의 생각이 더해져 따가운 시선으로 다가와 꽂힌다.


“육아를 하는 것이 저의 경제활동 여부와 사회적인 능력까지 의심을 받아야 하는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니 저 역시 ‘나를 그렇게 판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육아를 하는 동안 자존감은 떨어지고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거죠. 보편적인 한국 사회에서 보통의 남자들은 이런 문제에서 쉽게 초월할 수 없을 겁니다. 불편한 사회적인 개념에서 해방될 수 없거든요.” 


아이를 돌보는 일상은 혼자의 삶의 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시간이 잘 간다. 아이에게 집중하는 삶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쉽지 않다.


“사회적 편견은 내가 해결할 수 없어요. 해결하지도 못할 일로 고민하는 것도 시간낭비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결정한 일이고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이란 걸 깨닫게 된 거죠. 거기에 만족하고 집중해야지, 타인의 시선 때문에 흔들릴 거면 이 삶을 선택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애초에 고민을 하는 포인트가 틀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나의 문제의 원인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내가 알아주길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다른 시선과 다른 생각들에 집중하기보다 내 안의 내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육아는 아주 평범한 일이라고 들 하지만, 그처럼 많은 이들이 육아를 하며 내면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육아의 기본에 관하여 

“제 SNS에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전담 육아를 하며 생긴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기록해두었었는데요. 그렇다 보니 주변 지인들이 응원과 지지를 많이 보내줍니다. 그럼에도 육아를 전담한다는 건 스트레스가 쌓이죠. 아이들이 커가면서 제가 아이들의 사이클에 너무 맞추다 보니 제 일의 진행도 더디고 무엇보다 제 시간이 거의 없더라고요. 작년부터는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어 더욱 챙길게 많아졌어요. 나름의 패턴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이 도래하면서 출퇴근하는 삶이 아예 없어진 거죠.” 


누구나 참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상황에 맞춰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정해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날들이 지속되면 한계에 다다르고 만다. 번아웃 증후군의 다양한 증상은 결코 한 번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연히 여행자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행이 저에게는 굉장히 큰 도화선이 되어주었는데요. 그러니까 결혼 이후 저는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여행을 가게 된 거예요. 일정을 잘 마치고 둘러앉아 서로의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결혼 후 혼자 떠나온 여행이며, 아이들 없이 잠을 자는 것이 처음이라 긴장되고 사실 아이들이 걱정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혼자 여행을 와 있다는 것이 신선하고 짜릿했어요. 일탈을 즐기는 기분이랄까 그동안 제가 만들어둔 허들을 스스로 넘어서려는 순간 같았어요.”


온전히 자신에게 내어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던 그는 용기 내어 처음 만난 이들 앞에서 이야기를 했고 그들은 박수로 그를 위로하고 응원해주었다. 


“그 후 저에겐 독립된 장소와 독립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등산이라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등산을 하며 저는 온전히 저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거죠. 말하자면 그날의 첫 여행과 등산이 저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선사한 것입니다. 저는 그 시간을 통해 건강은 물론 다른 사람과 소통되고 있음을 느끼고 아이들과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습니다.”


육아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전문가들은 혼자만의 취미생활을 가지도록 권유한다. 육아의 중심에 있지만 가끔은 아예 전혀 다른 상황으로 자신을 이끄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이 좋아하는 것이면 금상첨화. 육아에 지쳤다면 김 대표처럼 자신만의 독립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할 것 같다.


“남자들이 육아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안 해봤기 때문입니다. 밥 먹이고 같이 노는 것도 힘들다고 하거든요. 캠핑을 좋아하는 아빠는 캠핑에서 즐겁게 노는 법을 압니다. 등산을 즐기는 분들 역시 산에서 노는 법을 알죠. 경험해보고 알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지만 반대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에 휴식은 술을 마시거나 소파에 누워있는 것뿐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육아는 힘들어집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고 노력해왔다면, 가족들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도 어떻게 보낼지 끊임없이 발굴하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두려울 수 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말이다.


“육아를 하는 사람이 엄마든 아빠든 스스로 자기중심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취미든 여행이든 자신을 오로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중심을 잡아가야 서로 충돌하지 않아요. 타인의 시선에도 자유로울 수 있고요. 나의 중심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가정에서 역시 갈등이 생기게 되는 거죠. 저는 이것이 육아를 위한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육아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그는 책과 유튜브를 찾아보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장 가까운 곳에 행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지켜야 할 것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고 말이다. 문제는 항상 나에게 있고 그 문제를 풀어가는 답도 나에게 있음을 기억하자. 내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다음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내가 선택한 삶이자 나의 가족이고 그 안에 있는 행복을 생각한다면, 매 순간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웹 칼럼 "아빠가 사랑한 육아"에 연재된 글입니다.

https://www.betterfuture.go.kr/front/notificationSpace/webToonEdit.do?articleId=240&listLen=6&cateNo=109&positio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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