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오리 Oct 29. 2019

우리의 해방

영화<아워 바디>

<스포일러 주의>

.

.

.

.

.

.

.

.

.

 <아워바디>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때였다. 그리고 1년 뒤 <아워바디>가 개봉하기까지 나는 자영(최희서)이 그리웠다. 어쩌면 자영의 바통을 이어받아 살아가고자 했던 1년이기도 했다. 이 글은 아마 일부 개인적인 소회를 달게 될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영은 지금까지 나 자신이 외면해왔던 것들을 마주하는 데 가이드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과거를 반추하는 회고록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워바디>는 성장에 관한 영화이다. 모든 성장영화가 그러하듯 주인공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성장통으로 이전과는 다른 누군가가 된다. 그런데 <아워바디>가 특별한 것은 그 성장의 과정이 자기 파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환경에 의해 누군가의 자극에 의해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자영에게 자극을 주는 주변사람들이 있다. 전 남자친구(오동민)가 그러했고 어머니(김정영)가 그러하고 친구 민지(노수산나)가 그러하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영이 한국사회가 그려놓은 ‘사람’의 구실 속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영에게 그들은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 됐을지언정 선택의 주요한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자영이 집중하는 것은 현주(안지혜)였다. 현주로 대변되는 자기인식이다. 이 자기인식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자기파괴다. 자기파괴는 사회적으로는 도움이 안 될 수 있지만 한 가지를 틀림없이 남긴다. 해방. 자영이 달려온 목적은 해방이다. 현주를 이해하기 위해 현주가 썼던 소설을 읽고, 현주가 달렸던 코스를 뛰어보고, 현주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는 것도 해방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는 것이다. ‘나이키 우먼’의 환상을 벗어버리는 영화 전체의 구조도 해방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정부장(장준휘)과의 섹스를 수군거리는 회사사람들과 민지의 평가는 자영을 고립되게 만들었다. 사실 따지고 들자면 그것은 자영의 판타지도 아니었다. 현주의 판타지였고 그 판타지의 실행이 현주를 이해하는 토양이 될 리도 만무하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파괴’를 위한 수단이었고 현주의 환상은 그 밑바탕이 되는 명분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도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꼭 보고 싶지만 아껴놓은 영화가 있었다. 오래된 영화지만 여태껏 수없이 회자되고 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작품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영화를 꼭 결혼할 사람과 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유치하지만 따뜻한 코코아를 나눠 마시며 추운 겨울 어느 아름다운 펜션의 하얀 벽에 빔 프로젝터를 켜고 소파나 그네의자에 앉아 담요를 나눠덮고선 이 영화를 결혼하고픈 그녀와 함께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프로포즈이자 결혼이라는 것을 아름답게만 포장해놓은 환상이었다. 그리고 여자 친구를 만날 때마다 그 얘기를 했다. 그러다 어떤 연유로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극심한 상실감을 느끼며 우울증을 앓았다. 나의 상담사는 그 환상을 깨어버리라고 조언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나의 작은 원룸 방에서 혼자 <티파니의 아침을>을 보았다. 그 때문에 나는 홀로 설 수 있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깨어버릴 수 있었고 혼자여도 괜찮으며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아워바디>의 결말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현주의 뒤를 쫓아가며 현주를 이해하려던 자영은 현주의 환상과 대화한다. “현주야 너는 달릴 때 무슨 생각해?”라고 자영이 묻자 현주는 오히려 “너는? 너는 무슨 생각하는데?”라고 대답한다. 자영은 결국 자신의 트랙을 돌아야 한다. 현주를 쫓는 자영은 결국 자신의 해방을 쫓아왔던 것이며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최고급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자위를 하는 자영은 대상이 있어야만 완성될 것 같았던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