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오리 May 31. 2020

잘 모르는 외부 세계, 잘 모르는 내면 세계

영화<톰보이>

스포주의

.
.
.
영화의 많은 부분은 인물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물이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누구와 마주보고 있는지를 통하여 많은 것이 말해진다. 시선은 때로 인물이 뱉어내는 말보다 훨씬 진실된 언어가 된다. 시선을 통해 텍스트가 쉽게 담아왔던 내면의 말들, 객관적이고 진실된 순간에 대한 표현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니 어쩌면 직설적인 텍스트와는 다른 방식의 표현일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에 붐을 일어켰던 부부의 세계를 보면 기존의 한국 드라마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방식의 연출, 어쩌면 영화적인 방식의 연출이 돋보이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선으로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캐릭터들의 시선이 즉시적으로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게 만들고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의 단초가 된다. 캐릭터는 시선으로 받아들인 정보와 감정들을 즉각적으로 체화하고 행동한다. 관객들을 곧바로 이해시키고  빠른 서스펜스가 가능하게 한다. 계속해서 쌓아올리는 젠가처럼 차곡차곡 빠르게 쌓아간다. 이런식의 빌드업은 우리를 캐릭터에 대한 감정적 일치를 일으키며 시청자와 캐릭터의 관계를 곤고히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왜 부부의 세계를 언급하냐면 사실 전혀 다른 장르, 매체, 톤앤 매너를 지닌 영화이지만 톰보이가 다루는 '시선'과 정반대인 지점이 재밌었기 떄문이다. 부부의 세계에서 다루는 시선의 얼개과 톰보이의 시선의 얼개는 완전히 다르다. 아니 정확히는 톰보이는 시선 그 자체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얼굴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어떤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자의 얼굴에 집중한다. 이야기의 얼개는 얼굴에서 바라보는 대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대상으로부터 얼굴로 이어진다. 이것을 통해 인물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체화하는 시간이 영화에 담기게 된다. 그로 인해 관객들은 정보의 취합을 이루는 한 인물의 고민들을 체험하고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로지 한 인물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된다. 나머지 많은 부분은 감춰진다. 아니 감추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들뜬 대화들과 즉각적인 반응으로 첨멸되지 않고 조용조용한 영화 전체 톤 앤 매너의 가치이다. 우리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적확한 말을 할 수 없다. 


소년은 무엇인가? 소년을 소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소년이 되고 싶은 소녀는 소년을 모르는가? 이 질문은 오로지 로라의 내면세계이고 그 바깥의 것들은 온통 미지로 가득하다. 이런 질문과 고통들이 우리들의 정체성을 세우는 기초로 작동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톰보이> 스틸컷


웃통을 벗고 축구를 하고 침을 뱉고 싸우고 아무데나 서서 오줌을 싸는 것이 소년인가? 로라는 소년이 되고 싶지만 소년을 모른다. 하지만 로라는 그런 행동을 하는 소년들을 보고 그것을 따라한다. 로라는 소년이 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소년으로 승인받고 싶은 것인가? 로라는 그런 자신의 행동의 본질을 잘 모른다. 그저 소년이고 싶은 욕망으로 행동한다. 어설프고 위태롭다. 우리의 모든 정체성이 머무는 곳이다. 세상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쉽게 부여받은 당연한 정체성 하나하나 모두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소년들은 무엇이 그들을 소년으로 만들어줬는지 스스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그런 스스로를 당연시하게 만든 그 환경들의 벽 안에서 알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워 질문조차 필요없는 우리의 정체성은 어쩌면 암묵적이고 당연한 카테고리 속에 존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소년인지 소녀인지와는 다른 문제이다. 대안없는 어쩔 수 없는 삶의 굴레 속에서 한 발 한 발 내딛어 가야하는 우리의 문제들. 그 속에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정체가 소녀인지 소년인지에 대해 그 확인을 강요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그 질문을 하여야 한다. 너는 누구니? 나는 누구야? 우리는 답을 내리지 못 할 수도 있다. 상처받을 수 있고 상처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시 누군가 '너는 누구니?'라고 질문하여주기를 '나는 누구니' 스스로 물어볼 수 있기를 염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희대의 찌질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