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 스포일러
스포일러
<소울>의 플롯은 <인사이드 아웃>의 것을 모태로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처음과 끝이 불가결의 방정식을 이루지만 그 안에 들어찬 것들은 고루하게 느껴진다. 플롯에 공식이 개입한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 수식을 진행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울 수 없는 뻔함으로 느껴진다.
그 이유는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씬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픽사 애니메이션이 꿈꾸는 야망을 그대로 비춰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뷰티>의 장면을 마치 그대로 재현한 듯한 이 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신비로운 힘에 대해 감탄하는 아름다움을 설파하는 씬이다. 그러나 왜 이것이 <아메리칸 뷰티>와 달리 이토록 이질적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작은 소용돌이 바람에 봉지가 춤추는 장면은 찍는 이의 통제를 벗어난 실제 세상을 사각 프레임 속에 담아둔 것이다. 찍는 이와 찍는 이의 통제를 벗어난 실제의 세상이 1:1의 관계를 이룬다. 찍는 이는 카메라로 현상을 관찰하고 움직임에 반응하며 실제와 관계하게 된다. 마치 잼으로 이뤄진 즉흥적인 재즈처럼. 반면 <소울>의 떨어지는 낙엽의 모든 움직임은 애니메이터의 계산으로 이뤄져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낙엽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터가 그려놓은 경로를 가장 그럴듯한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구현하는 세계의 정체성이다.
주인공의 직업은 또 그의 꿈은 재즈 피아니스트다. 무대에서 그가 보여주는 즉흥곡들은 그 무대를 마치 실제처럼 느껴지도록 피사체(가수)에 반사되는 조명 효과와 실제와 비슷한 높은 프레임의 움직임으로 반응하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 픽사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발달은 보다 더 높은 화질과 자연스러움 움직임으로 실제를 흉내 내는 것에 방점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그 실제성 자체보다 실제에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봉사하는 것으로 기능하면서 재현의 가치를 실제성과 혼돈하게 하지 않았다. 일종의 비유였기 때문에 현실에 가까워질수록 실제성을 닮아가는 애니메이션 기술력은 일련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울>은 그들의 기술력이 이야기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기능을 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의 데칼코마니로 기능할 수 있다는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왜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했냐는 질문을 해보면 딱히 그래야만 하는 당위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화로 찍어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영혼세계에서의 애니메이션을 더 풍성하게 해 줄 의미가 만들어진다. 황홀하고 아름다운 그림체(영화 속 실제 세계와 영혼 세계 둘 다)와 과장된 움직임을 제외하고서는 이 영화의 모든 부분들은 실사화 될 수 있다. 제작사가 디즈니 픽사라는 메이커로서의 관점을 벗어나는 의미적인 이야기의 기획을 발견할 수가 없다. 조금 과격하게 뒤집어 말하자면 <소울>은 애니메이션으로써의 표현성을 넘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실제를 재현하는 행위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일을 한 것이다.
<소울>은 <인사이드 아웃>과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 완전히 상반된 모태를 가지고 있다. 내면과 외면이다.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이 왜 청소년일까? 물론 어른들도 자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가 면밀히 파악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청소년들은 또 그 청소년기를 거쳐 온 어른들은 자기 내면의 알 수 없는 울림들에 대해 즉시적인 판단이 서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내면의 여행은 내가 거쳐 온 불안했던 감정들에 의미를 부여해주며 인간성의 내밀한 곳의 공백을 채워주는 가치를 가진다.
<소울>도 언뜻 보기에는 그런 내면을 건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의미를 풀어보면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영화가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주제의 거대함은 비유적인 세계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하고 거대한 여행기’에 의해 빼곡하게 들어찬 (흔히 말하는) 블록버스터급의 영화적 허용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 세계의 그레이트 에프터에서 그레이트 비포로 넘어가는 순간들과 영혼 22를 찾아 배를 몰고 찾아다니는 등 모든 장면들은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우연이면서도 영화적으로는 엄청난 필연을 가진다. 그렇게 됐을 때 이 영화는 영화적 재미로서의 감흥을 제외하고서는 무엇이 남게 되는가? 이 질문이 왜 이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그들의 여행기가 비유를 벗어나 어떤 인간성을 파악하는 필연적인 루트가 되었을 때 ‘삶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잘 짜 맞춰진 설파가 될 뿐이다. 낙엽의 움직임의 경로를 애니메이터가 설정해놓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