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렉티브 무비, 텔테일 게임의 방향성
<스포일러 주의>
프롬소프트가 게임 <다크소울>이 시리즈 3편으로 끝낸 이유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고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리즈의 팬층이 이토록 두터운데 단순히 고였기 때문이라는 말만으로는 그들의 결단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고였다는 말은 다르게 표현되어야 한다. ‘유저가 성장했다.’ 유저의 성장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다크소울>이라는 게임의 특징과 이어졌을 때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다크소울>은 죽음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미션을 클리어하는 방법을 체득함으로 플레이어 자신이 성장하게 되는 게임이다. 이런 <다크소울>의 시스템의 경험이 시리즈를 거듭하며 플레이어에게 상당 부분 축적되었기에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콘텐츠의 생산이 어려워진 것이다. 플레이어에게 누적된 경험치 때문에 결국 기존 게이머와 신규 게이머를 아우를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든 것이다.
영화에서도 이와 흡사한 형태의 장르가 있다. 바로 타임루프물이다. 타임루프 장르의 시작은 사랑의 블랙홀을 들 수 있겠으나 가장 게임과 흡사한 영화를 고르라면 <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해피데스데이>로 볼 수 있겠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을 통해 캐릭터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학습하고 하나의 스테이지를 깨듯 다음 스텝으로 다음 스텝으로 상황을 해결해나갈 방법들을 익히게 된다. 앞에서는 해보지 않았던 선택들을 해봄으로 그로 인한 새로운 정보들이 주인공에게 누적되며 주인공은 전체의 그림을 하나씩 익혀나간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친 뒤에는 영화 초반의 주인공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법한 최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선택은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의 반복을 깨게 되고 주인공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게 된다. 타임루프 장르는 모두 이 동일한 규칙을 여러 다른 상황들과 합쳐지는 소재를 통해 새롭게 체험될 뿐이다. 마치 프롬소프트가 <다크소울 시리즈>를 접고 <세키로>를 만들 듯이
그러나 영화와 게임에는 크나 큰 차이가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에 감정적 이입까지는 할 수는 있으나 주인공 자체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임은 내가 곧 캐릭터고 캐릭터가 곧 나다. 게임 디바이스의 컨트롤러(모바일 터치도 키보드, 마우스도)를 통해 화면 속 오브젝트와 캐릭터를 움직이게 하는 선택은 플레이어 자신을 게임 속에서 앞으로 일어날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주체로서 인식하게 한다.
이렇듯 게임은 원래 동적인 콘텐츠이기에 인터렉티브라는 말은 게임 앞에 달 수 있는 수식어로 적합하지 않다. 인터렉티브란 원래는 정적인 콘텐츠에 동적 작용이 가능하게 된 콘텐츠에 어울리는 단어일 것이다. 그래서 <인터렉티브 무비>와 <텔테일 게임>은 같은 말이면서도 그 모태가 영화냐 게임이냐에 따라 다르다.
영화에서 바라볼 때 컨트롤이란 전에 없었던 선택 과정이 추가된 것이지만 게임에서 바라볼 때는 기존 게임에서는 무수히 많았던 컨트롤(선택)의 과정이 상당 부분 축소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기존 게이머의 경우 스토리의 분기로만 구성된 <텔테일 게임>은 들인 시간과 그에 따른 보상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생기게 된다.
또 영화를 기대하는 유저의 입장에서 컨트롤(선택)이란 자칫 거추장스러운 부담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관객은 캐릭터 스스로가 내리는 결정의 과정을 통해 인물을 탐구하게 되고 인물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내는 전체적인 메시지와 의미를 얻어가는 즐거움을 기대하는데 <인터렉티브 무비>에서 이뤄지는 선택의 과정은 내가 개입함으로써 캐릭터를 방해하게 된다는 불편함을 얻는다. 또 선택하지 않은 무수한 분기 때문에 이 콘텐츠를 속속들이 다 보지 못했다는 인식을 하게 되어 완전한 만족감을 얻기 힘들다. 하물며 스스로가 원하는 결말이 아닐 경우에는 그런 인식이 더욱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단점은 텔테일 게임이 혹은 인터렉티브 무비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안나푸르나 게임에서 만든 <12 minutes>는 이러한 인터렉티브 무비, 텔테일 게임의 단점을 상당 부분 보완한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앞서 말한 타임 루프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말이다.
우선 게임성에서는 텔테일 게임의 한계점이던 QTE 시스템을 벗어났다는 점이 크다. 10분이라는 시간 안에 선택을 활성화시켜야 특정 이벤트가 일어난다는 한계점이 있지만 기존 텔테일 게임에서의 분기에 따른 제한적 선택보다는 능동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12분>에서는 캐릭터를 움직이고 오브젝트를 활용하고 대화를 활성화시키는 개념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기존 텔테일 게임들은 앞에서 뒤로 흐르는 선형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기에 나의 선택이 축적되어 이뤄내는 결과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선택들을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은 결국 플레이 중인 게임을 다시 뒤로 돌리는 형태가 되기에 몰입을 방해하게 된다. 그러나 <12분>은 타임 루프라는 개념을 활용하면서 플레이어가 스스로 게임의 구동을 멈추고 뒤로 돌리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모든 선택의 과정이 플레이어와 캐릭터 모두에게 경험으로 축적되기에 다양한 선택 모음들은 일종의 전략으로 변모하게 된다. 마치 <다크소울>에서 죽음의 과정이 플레이어에게 남기는 경험과 흡사하다.
영화, 스토리 측면에서는 이런 전략적 선택으로 인해 제작하는 입장에서 만들어내는 스토리라인의 큰 변동이 없더라도 스토리의 전개가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의미적으로 <인터렉티브>와 동떨어질 수도 있는 개념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존의 수많은 분기로 인해 갈라지는 엔딩들은 콘텐츠를 완전히 즐겼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 <12분>은 타임루프를 깨야한다는 목표 안에서 해결해나가는 플레이로 사건의 전말을 깨달을 수 있고, 개인마다 그걸 구성하는 순서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단일의 스토리로써 인식되게 된다. 이스터에그 같은 소소한 과제 달성은 차치하고서.
게임 <12분>에서 텔테일의 장르와 타임루프를 가능하게 했던 가장 중요한 게임 장르는 바로 방탈출 게임이다. 방탈출은 갇힌 방 안에서 단서를 찾아 추리하고 탈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임이다. 그 단서들의 조합이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런 방탈출 게임의 추리게임요소를 타임 루프라는 소재로 엮으면서 <12분>은 자연스럽게 기존 텔테일 게임 장르의 단점들을 보완시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12분>에는 크나 큰 단점들이 존재한다. 각 특징별로 꼽았던 장점의 이면에 항목별 단점 1가지씩 총 3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너무 많은 반복 플레이다. 하나의 정보를 얻어내고 나면 다음 화차를 진행하기 위해 앞선 과정을 다시금 수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너무 많다 보니 그 과정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과정들은 바로 잘라 내거나 간소화시킨다. 앞과 똑같은 과정은 굳이 또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루한 반복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제작자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이기는 한다. 이 부분은 세 번째 단점에서 더 자세히 말해보겠다.
둘째, 스토리가 타임루프 장르가 주는 장르적 쾌감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타임루프 장르의 영화들은 각기 특색에 맞는 다른 소재와 결합되어 마치 새로운 체험을 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 모두 동일한 장르 전형의 컨벤션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이 관객이 이 장르에게 기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타임루프 장르는 타임루프에 갇힌 주인공이 타임루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의 처음의 캐릭터가 하지 않았을 법한 선택을 함으로 캐릭터의 내면이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면의 성장이 결국 타임루프를 깨부수게 되는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12분은 이런 장르의 규칙을 수행하지 않는다. <12>분은 결국 타임루프를 깨부수지도 못할뿐더러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12분>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성장이 아니라 절망이었고 포기가 되었다. 또한 엔딩에서 캐릭터의 기억을 지운 채 리플레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결론을 맺으며 타임루프가 영원히 반복되는 지옥도를 그려놓게 된다. 관객의 입장에서나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나 이는 분명히 허탈함을 남기게 된다. 특히나 직접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던 플레이어에게 그 허탈함은 더욱 크다.
셋째, <12분>은 방탈출 게임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그대로 체감할 수 있다. 여타 다른 방탈출 게임처럼 단서가 부족하거나 너무 억지로 꼬아 놓은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심지어 운으로 때려 맞춰야 할 때도 있다. 특정 시점으로 가기 위한 클릭 범위를 너무 좁게 만든 지점은 상당히 불친절한 난이도다. 물론 일반적인 방탈출 게임과 달리 <12분>은 스토리 전개를 통해 체득된 정보로 어느 정도 그 위치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정보를 얻기 위해 활성화되어야 하는 대화 분기 역시도 제한 시간 내에 타이밍에 맞게 대화와 오브젝트 사용을 적절하게 순서 배치해야 활성화되기에 큰 난이도가 존재한다. 이는 어떤 플레이어에게는 정확한 미션을 수행하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많은 플레이어에게 그런 과정은 반복되는 과도한 스트레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런 게임성은 플레이어에게 단순히 높은 난이도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체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만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영화적 체험을 최대한 재연하기 위해 최소화된 UI가 아니라 게이머에게 친화적인 UI 기능이 필수일 것이다. 이미 해봤던 각 분기의 선택을 리얼타임으로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턴제 시뮬레이션 게임의 스케줄 편성처럼 구성하여 이를 저장해둘 수 있는 기능이 필요하다. 이런 기능은 영화에서 지루한 부분을 점프하는 연출과 같음으로 오히려 영화적 체험을 더욱 탄탄히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12분>은 초반의 흥미진진함을 무색하게 만드는 반복 플레이가 상당히 아쉽긴 하지만 텔테일 게임 / 인터렉티브 무비가 가야 할 방향성을 지시해주는 좋은 콘텐츠임은 틀림없다. 인터렉티브 무비는 기존의 단순한 QTE 플레이를 지양하고 보다 폭넓은 게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은 원래부터 게임성을 가지고 있는 스토리의 장르를 접합함으로 이뤄진다. 지금 말하는 장르는 단순히 SF, 판타지, 누아르, 범죄물, 서부극, 괴수물, 슈퍼히어로와 같은 배경적 장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극의 작동원리에 해당하는 장르를 말한다. 추리, 실종, 탈출, 타임루프, 성장, 소울 체인지, 첩보와 같은 아이디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일례로 야구를 소재로 하지만 실상은 구단을 운영하는 것이 주된 골자인 영화 <머니볼>이 있다. 게임으로 치자면 풋볼매니저 게임과 같은 스포츠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처럼 역경을 이겨내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 특정 영화 장르들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게임성을 품고 있다. 기존의 극의 메시지에 치우친 구성이나 도덕적 딜레마를 통해 양자택일하는 분기별 선택지는 다양한 게이머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거나 몰입하도록 만들 수 없다.
또 초반부터 동기가 확실한 주인공 캐릭터와 그에 상충하는 상황(역경)들이 명확해야 한다. 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유추할 수 없다면 그 선택은 플레이어의 플레이 동기를 이끌어낼 수 없다. 의뭉스럽게만 할 뿐이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선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영화의 방식이다. 쉽게 말해서 플레이 목표에 따른 정답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기가 확실한 주인공 캐릭터를 통해 플레이 목표가 생기도록 만들고, 그 목표를 만족시키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지를 만들면 QTE를 넘어선 다양한 형태의 게임 체험을 만들 수 있다.
코지마 히데오는 영화와 게임 모두 언젠가는 스트리밍이 메인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영화와 게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듯한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매체가 등장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그 경계가 허물어지더라도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가 ‘생성’된다는 것뿐이지 모든 게임과 영상물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은 아니다. 즉 영상은 영상대로 게임은 게임대로 기존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시키고 있을 것이며 영상과 게임의 경계가 사라진 새로운 콘텐츠는 특정 수요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와 게임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장에 가장 적합한 스토리텔링은 따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