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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Oct 19. 2022

우리는 카이로스를 놓치지 않았다

올가 토카르추크를 좋아해요. 저는 지금까지 그의 소설 세 권을 읽었는데요, 그 소설들은 다정함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우리의 미래는 다정함, 바깥으로 향하는 다정한 시선이 지킬 것이라 믿는 문장들이 있지요. 9월에 새로운 책이 나왔습니다. 토카르추크의 에세이 열두 편을 묶고 <다정한 서술자>라는 이름을 달았네요. 제목 정말 좋아요.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기조 강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열두 편 중에서 가장 좋은 단 하나를 고른다면, 길고 깊은 고민 후에 첫 번째 에세이 <오그노즈야>라고 말하겠어요. 몇 번이나 읽었어요. “고민과 숙고와 담론들로 짓밟힌 길을 넘어가서, 중심부의 언저리를 쳇바퀴처럼 맴도는 거품과도 같은 체계를 벗어나”자는 목소리에 가슴이 떨렸죠. 그리고 그 목소리가 소개한 그림이 인상 깊었어요. 그림 앞에서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조금 두렵고 슬픈 마음에 닿았고요.      


플라마리옹 목각화라고 불리는 그림이에요. 누가 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프랑스의 천문학자 플라마리옹의 책에 삽화로 실려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우리 같이 그림을 볼까요.     


출처: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민음사, 12쪽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진 두 세계가 보여요. 무엇이 보이나요? 왼쪽 세계는 낯설어요. 무늬들이 배열되어 있는데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네요. 반면 오른쪽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에요.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들판에는 나무와 건물이, 저 너머에는 둥근 언덕과 물결치는 바다가 있어요. 맞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입니다. 그렇다면 왼쪽 세계는 지구 밖 우주,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지구의 경계를 넘어서 우주를 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어요. 익숙한 세계의 끝에서 낯선 세계를 마주한 이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환희에 차 웃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두려움에 몸서리치고 있을지도 몰라요. 저곳으로 나아갈까요, 아니면 이곳에 머물러 있을까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까요.

       

만약 이 사람이 저라면, 얼른 머리를 뒤로 당겨 지구 안으로 들어왔을 것 같아요. 빠르게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찬물을 한 잔 마실 거예요. 그리고 한참 고민을 하겠죠. 어떻게 하지. 타고나길 겁이 많은 사람이고 살다 보니 망설이는 사람이 되어버려서요. 아무래도 우물쭈물하다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지구의 끝이자 우주의 시작을 뒤로 하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살아갈 것 같아요.       


저는 제가 특별하다고 믿어 왔어요. 부모님이 항상 해주던 말. 너는 특별하니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저의 가장 친한 친구는 평범하게 살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평범하게만, 그게 제일 어려운 거야. 처음에는 우리가 정말 다르게 컸구나,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는 비슷하게 큰 거예요. 누가 정해 놓은 법칙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순서대로 미리 정해져 있는 나잇값을 치르며 나이를 먹고 있어요. ‘중심’에서 벗어날까 봐 ‘비정상’이 되지 않도록 애쓰며. ‘특별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에는 중심에 대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을 테죠. 중심의 중심. 세상 한가운데 우뚝 선 잘난 사람. ‘평범한 게 제일 어렵지만 평범한 사람’에도 중심에 대한 욕망이 있고요. 평균을 유지하여 주변이 되지 않을 것. 저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단 한번도 중심의 바깥을 상상했던 경험이 없어요. 그러니 지구의 끝에서 우주로 가는 문이 열린 순간에도 기회를 잡지 못하고 뒷걸음질만 치는 거죠.      


코로나 팬데믹, 기후변화, 잃어버린 감각과 멈추지 못하는 혐오. 이 시대는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요. 토카르추크는 다가올 시간을 염려하는 사람이에요. 우리처럼요. 하지만 과거로 회귀하거나 전통을 고수하는 방법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죠. 익숙한 사고방식이나 안정적인 세계관에 부합하는 관습에 순응하지 않고, 정상적이고 당연하다 여겨지던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용기 있는 태도가 우리의 미래를 더 나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해요. 플라마리옹 목각화를 카이로스적인 순간이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에요. 등에 있는 커다란 날개로는 부족한지 발에도 날개가 있어서 바람처럼 아주 빠르게 움직여요. 기회는 순간이고, 순간을 잡지 않으면 그대로 떠나버리죠.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야 잡을 수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머리카락이 머리 앞쪽, 이마와 귀 옆에만 수북하게 있어요. 뒤쪽에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어서 카이로스가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 잡지 않으면 저 멀리 날아가는 카이로스의 대머리만 보고 있어야 해요.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 순간,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변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남게 되겠죠.      


프란체스코 데 로시, Time as Occasion (kairos)


아, 저 같은 사람은 뒷걸음질만 치다가 새로운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걸까요?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고 그 기회를 잡고 싶은데 말이에요. 다음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 어른이 되고 싶은데, 어쩐지 주눅이 듭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따라오더라고요. 나는 카이로스를 놓치지 않았다. 우주처럼 대단한 세계는 아니지만, 약간의 용기를 가지고 경계를 넘어섰던 경험들이 분명 있어요. 기억하지 않았다면 별다른 의미 없이 그저 사건으로 흘러갔을 순간들, 그 순간들을 무사히 구해 냅니다. 경험들이 쌓여 자아가 만들어지는 거니까 무심한 순간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만드는 일은 아주 중요해요. 처음으로 혼자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던 순간,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쓰고 취업과는 거리가 먼 전공을 선택해 대학원 등록을 하던 순간,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왔지만 배려받지 못했던 관계였음을 인정하고 정리하던 순간. 저는 생각보다 자주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고 운명의 방향을 약간, 15도 정도는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요.

      

카이로스가 손에 든 칼과 저울을 보았나요? 칼과 같은 결단력과 저울과 같은 판단력이 있어야 저 멀리서 다가오는 카이로스를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칼은 무뎌졌고 저울은 녹슬었지만 다시 칼은 날카롭게 갈아두고 저울은 깨끗하게 닦겠어요. 우리는 카이로스를 놓치지 않았어요. 손에 운명의 방향을 쥐고 조금씩 바꾸며 살아온 사람들이니, 앞으로 다가올 기회의 순간도 잘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바깥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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