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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suk Joseph Oh Jan 07. 2019

한복과 교황님 일반 알현

나는 아직 우리나라 대통령님의 손을 잡아 본 적이 없다

2009년 9월의 어느 수요일.

로마의 아침은 일찍부터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이미 광장에는 각국 국기와 순례 단체의 현수막을 양쪽에 든 순례객들이 서로 성베드로성당 앞 가까이 자리를 잡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고, 제대 앞쪽으로는 이미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로 광장 앞부분을 꽉 채웠다.

테르미니 역 근처 한인민박집에서 양복을 갈아입고 택시를 타고 성베드로광장에 도착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동생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동생은 추석 연휴 동안 월차를 붙여 9일간의 휴가를 만들었다. 만 8년 영국에서 고교와 학부 유학을 했는데, 한국음식이 없으면 못 사는 체질이다. 이미 나흘간의 여정 동안 한국음식을 구경하지 못하고, 란치아노에서 중국식당에 들어가 아시아 음식을 겪은 것 외에는 한식을 먹지 못했다. 자세하게 컨디션이 어디가 안 좋은 지는 말하지 않고, 어제 로마로 오는 길에,

"형, 난 내일 일반 알현 참석 못할 것 같아."

 청천벽력 같은 포고를 했다.

강요할 수 있는 그런 사안도, 그런 관계도 아니었다. 우리 형제는 동생 결혼 1년을 앞두고 조금은 서먹서먹했다. 주임신부님께서 본인의 동생을 데리고 메주고리예에 단둘이 성지순례를 다녀와 형제관계가 회복이 되고, 그 얘기를 내게 들려주시면서 '동생이 결혼하기 전에 평생 추억에 남을 여행을 하고 못다 한 얘기를 풀어보라"라고 말씀해주신 게 성지순례의 동기가 되었다.

성지순례에서 동생을 만나기 직전, 그리스의 어느 시골 도시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나는 동생이 우편으로 부쳐준 '땅 위에는 하늘을 닮은 곳이 있다'(김형찬 신부님 편, 출판사 주심)을 받았다. 여행사를 거치지 않고 당시 본당을 맡으시던 이태원 성당 신자들을 위해 신부님 본인이 직접 여정선택과 에스코트 가이드를 맡아 이탈리아를 순례한 책인데, 둘이서 동시에 이 책을 읽고 공통적으로 가고 싶은 곳만 정해서 여정을 짜자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그리스 어학연수를 나오기 전에 초등학교 때 성가대하던 주임신부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 형제가 같이 성지순례를 하겠다고 계획을 말씀드렸다. 주교님이 되셔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소개장을 써줄 테니 일반 알현을 하고 오라고 등을 토닥여 주셨다. 바티칸에 낼 소개장을 그렇게 손에 쥐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식당이 즐비한 테르미니 기차역 근처의 식당 한 곳을 골라 갈비구이와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이렇게 주문하고 점심식사를 했다. 저녁엔 한인민박집에서 제공하는 삼겹살 수육으로 마음껏 한식에 대한 그리움을 다독였다. 직장생활 이미 9년 차에 호텔이며 조금은 편한 여행에 익숙해 있던 동생은 여러 사람이 함께 기숙해야 하는 한인민박집을 불편해했지만, 그 날 그 저녁에 나온 삼겹살 수육으로 어딘지 좋지 않은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그리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일 갈 수 도 있을 거 같아". 한마디 하고는 다시 아이팟의 음악세계로 빠져들었다.


동생이 그렇다고 아주 일반 알현에 대해 무지몽매한 채로 아무 준비 없이 로마로 따라나선 건 아니었다.

같은 회사 후배 중에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로마로 와서, 수요일 일반 알현 중에 신혼부부를 교황님께서 축복해주시는 자리에 참석했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 다른 부부들은 면사포 쓰고, 턱시도 입고 팔짱 끼고 대기하는데 그 부부는 서울에서 한복을 가져가 입었다. 그랬더니 집사 복장을 한 비서가 다가와, 신혼부부들을 대표해서 교황님께 꽃다발을 드리도록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이국적인 옷이어서 더욱 주목받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내심 짐작만 했다.

올해 성가대 세미나 교황님 일반 알현 때 왼편 옆자리에 라트비아에서 온 신자(아니면 수녀님인지)와 일반 알현을 앞두고 서로 자기소개를 했다. 내 오른편 옆자리는 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에서 온 자매가 앉았다. 라트비아 자매님에게 어떻게 미리 교황님 일반 알현에 초대받았냐고 궁금해서 영어로 물었다. 그랬더니 1. 세미나 때 라트비아 참가자를 대표해서 일반 알현에 참석할 수 있는지 2. 참석에 수락한다면 출신국의 전통의상을 지참해서 입고 알현할 수 있는지 이메일이 왔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으로 참가한 우리 7명 외에 다른 한국 신자가 있는지는 확인은 못했지만, 우리 7명 중에는 그런 이메일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교황님 일반 알현을 앞둔 비 이탈리아 신자들 중 각국을 대표하기 위해 알현 장소인 바티칸시국 내 바오로 6세 홀의 첫 줄에 앉은 신자들은 모두 전통의상을 입었다.


"왜 일반 알현이 의미가 있는지 이제야 깨달은 거 같아."

야외 제대에서 강론을 마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 제대 왼편에서 '포프모빌'(교황님의 차란 뜻으로 신자들을 만날 때 서서 인사하시는 지붕 없는 차)에 타시고 우리 쪽으로 돌아 다시 교황궁으로 가시는 길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알현객은 제대의 왼편에 앉을자리가 마련되었는데, 이미 첫 줄은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나 장애인 신자가 자리 잡고 우리 형제는 앞줄에서 세 번째에 앉았다.

고교 3년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외무고시 5년 준비하는 동안 독일어를, 그리고 독일 정부기관 서울 사무실에서 인턴 하느라 2년을 남산 주한 독일문화원으로 출근하고 독일문화원 어학수업을 들었는데, 독일 출신의 교황님을 눈앞에서 보니 이때만큼 독일어가 쓸모 있다고 생각할 때가 없었을 정도로 큰 소리로,

"Kommen Sie uns. Wir kommen aus Korea. (저희에게 와주셔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반복해서 외쳤다. 교황님과 눈을 마주쳤다. 아수라장 같이 아우성이 좌우에서 터지는 와중에 아시아계 얼굴을 한 신자가 독일어를 하니 표정이 환하게 바뀌신 교황님을 봤다. 아이 한 사람 키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워졌을까 싶을 때 교황님을 모신 포프모빌은 성베드로성당쪽으로 기수를 돌려 내게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포프모빌에서 내리셔서 면사포와 턱시도를 입고 교황님을 맞이하는 신혼부부들에게 축복하신 후 다시 포프모빌에 오르시곤 퇴장하셨다.

그날 일반 알현이 끝나고 점심을 먹는데,

"아이돌 공연하고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교황님을 향해 그렇게 열광하며 서로 손 한번 닿고, 옷깃 한번 스쳐보려고 아우성치는 게 신앙과 뭐가 연관이 될까. "

라고 동생이 얘기했다.

지금도 어리석은 나의 신관에 속 시원한 답을 해줄 순 없었고 현재도 그렇다. 그저 알현 순간의 기쁨을 나머지 인생의 신앙에서 등불처럼 횃불처럼 지침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라고 답했다.

7~8년쯤 지났을까. 이젠 동생 식구는 조카가 생기고 조카도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어느 날, 일반 알현 얘기를 동생이 먼저 꺼내더니,

"왜 일반 알현이 의미가 있는지 이제 깨달은 거 같아"라고 툭 한마디 던졌다. 한참 미사를 참례하는데 문득 그때의 기억이 막 떠오르더라는 것이다. 같은 교황님을 뵙는 자리라도, 그 자리에 참석한 신자마다 분명 같은 답일 수는 없다. 신자마다 느끼는 감동은 신자 수효만큼 다를 테니까.


올핸 3개월에 한 번꼴로 한국에 갈 수밖에 없었다. 1월엔 학교 방학을 이용해 부모님 제사를 지내러 갔고, 3월엔 봄방학 일주일을 이용해 2018 평창 장애인올림픽의 자원봉사를 했다. 7월엔 갑자기 한국 집을 월세 들어온 세입자가 집을 빼겠다기에 잔금 날 본인 확인차 한국을 갔다. 추석에 한국을 갈 수 없어 11월에 미국에서 호주에 출장차 가는 길에 한국에 들러 부모님 산소 성묘를 하고자 했으나, 그 기간 중에 뉴욕주 변호사시험 통과에 필요한 법조윤리시험을 미국 본토에서 치러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장과 홍콩 출장을 묶어 10월에 일부러 한국을 거쳐서 들러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11월 바티칸 성가대 세미나 참가 정보를 알았던 시점이 6월이었다. 11.23-25일은 정확히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 연휴와 겹쳤다. 7월에 한국을 가서는 오랜만에 석촌동 성당 11시 미사 지휘자 선생님께서 봉사하시는 수원교구 소속 "참보이스앙상블" 의 지휘자 선생님과 부군 되시는 김호동 교수님을 뵙고, 세미나에 같이 가시 자고 졸랐다. 이참에 화요일 저녁 8시 30분부터 군포 계원예술대학교 입구에 있는 "참보이스앙상블" 연습실까지 따라가 두 시간 반 성가 연습을 다하고 형님들에게 세미나를 같이 가시자고 제안했다. 여유 있게 길게 한국에 머물지 못하고 바로바로 미국에 돌아와 공부해야 하는 형편이니 이때도 한복 챙길 시간이 없었다.  

10월에 한국에 가서는 열흘 안에 아르헨티나-아프리카 경유-홍콩을 거쳐 한국을 들어오는데, 몸살이 겹쳤다. 부산에 하루, 서울에 이틀 있는 일정을 가까스로 서울에 반나절 더 있다 화요일 아침에 미국 돌아오는 일정으로 바꾸었는데, 아르헨티나나 아프리카 경유지가 전염병 유의지역이라 열이 나거나 기침이 심하면 행여 출국을 못하고 질병관리본부에서 격리 추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모님 산소 성묘도 못하고 이태원 부근 의원에서 링거를 맞았다. 한국에 있는 짐은 광명역 부근과 서하남 인터체인지 부근의 컨테이너에 모두 맡겨두고 있는데  컨테이너 안에 있는 한복을 찾으러 갈 시간도 없었다.

내 한복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입으신 한복을 물려받은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머니가 시집올 때 지어온 청색 마고자 조끼에서 대추색 마고자 조끼로 새로 한복을 지어 입으셨는데, 그 한복집을 내가 따라다녔다. 남대문시장 C동 그릇도매상가 2층 주단 골목. 그 시절엔 바느질하시는 할머니들도 남대문시장 C동에 같이들 계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곤 속저고리와 바지만 내 체격에 맞게 사고 대추색 조끼와 마고자는 그대로 입었다. 30년의 기억을 더듬어 미국 귀국 전날 주단 골목이 거의 끝나갈 5시경에 다시 남대문 시장 C동을 찾았다. 기존에 마고자 조끼는 있으니, 이번엔 쾌자 외에 저고리 바지도 맞추어 나중에 이 저고리와 바지도 마고자 조끼에도 받쳐 입을 수 있게 했다. 체촌을 하고, 열흘이 돼서 미국 마이애미 집으로 한복이 배달되었다.

그저 바티칸 미사 때 입고 서리라고 생각하고 준비한 한복인데 이 한복이 결정적 역할을 할 줄은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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