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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 Nov 13. 2015

걱정하는 게 도움이 돼요?

영화 <스파이 브릿지>

개봉 일주일이 지났는데 이 영화를 한국에서 아직 20만 명밖에 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자극적인 요소가 부족해서일까? 하지만 냉전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 스릴러가 꼭 '007 시리즈'처럼 요란할 필요는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코엔 형제 각본, 그리고 톰 행크스 주연이라는 이름값만으로도 가슴 뛰기에 충분한데 영화는 2시간 20분 동안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고, 시종일관 우아하며, 58년전을 배경으로 함에도 심지어 세련됐다. 각본은 촘촘하고, 대사는 울림이 있으며, 대사가 없을 땐 영상이 말을 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몇십 년 후 고전영화의 반열에 오를 스필버그 최고 걸작 중 하나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 이야기다.



걱정하는 게 도움이 돼요?


영화 속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의 대사다. 그는 자신에게 사형이 선고될지도 모를 법정에서 마치 재판따윈 관심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본다. 변호인 제임스 도노번(톰 행크스)이 그에게 “걱정 안 돼요?” 라고 묻자 그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게 도움이 돼요?(Would it help?)”


영화 <스파이 브릿지>는 걱정이 일상이 된 차가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 공포가 최고조에 달했던 1957년, 보험회사 변호를 주로 해온 도노번은 국가의 요구로 마지못해 아벨의 변호를 맡게 된다. 당시 미국 사회는 공산주의자들이 뉴욕에 핵폭탄을 터뜨리려고 한다고 학교에서 가르칠 정도로 일상에 공포가 만연한 곳이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이 당장 사형시키라고 손가락질하는 소련 빨갱이의 변호를 맡았으니 도노번 역시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출퇴근길 열차에서 사람들은 그를 보며 수근거린다. 하지만 그는 아벨의 인간적인 면모에 점점 끌리게 되고, 무엇이 아벨과 미국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일지 생각한다.



아벨은 그의 조국을 위해 일하며 끝까지 신념을 지켰습니다. 만약 미국인 스파이가 소련에서 체포된다면 우리도 그에게 아벨처럼 하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도노번은 법정에서 아벨을 변호하며 이렇게 연설한다. 그리고 그의 이 발언은 몇년 후 그가 소련과 스파이 교환 협상을 벌이는 계기가 된다. 도노번은 민간인 자격으로 동독으로 날아가 홀로 소련 및 동독 정부와 협상을 벌인다. 그리고 마침내 베를린의 글리니케 다리에서 양국에 구금된 스파이를 교환하기로 합의한다.


영화는 크게 3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아벨이 체포되고 도노번이 변호를 맡는 과정, 두 번째는 치열한 법정드라마, 세 번째는 스파이 교환이다.



일개 변호사였던 도노번이 냉전시대 한복판에서 펼치는 이 이야기가 시종일관 흥미진진한 이유는 영화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는 실제 제임스 도노번이 1964년에 펴낸 책 [다리 위의 이방인들(Strangers on a Bridge)]을 참조해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실명이고, 5센트 동전을 이용한 스파이들의 암호 전달 방식, 법정 연설, 스파이 교환 장소 등 모두 당시 실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또 하룻밤 사이에 베를린 거리에 장벽이 쌓이는 과정, 베를린 장벽을 지나가는 S-Bahn 열차, 소련 재판정 모습, 폐허가 된 동독의 거리 등 고증이 잘 된 당시 동구권 광경 역시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영화 제목인 ‘스파이의 다리(Bridge of Spies)’는 미국과 소련이 그 시절 몰래 스파이를 교환했던 베를린의 글리니케 다리를 지칭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스파이들 사이의 ‘다리’가 된 한 남자를 은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리 위에 서 있는 이 남자, 즉, 도노번은 멀쩡한 거리에 벽을 쌓은 뒤 넘어가면 쏴죽이는 경직된 세상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곧잘 회한에 잠긴다.


스필버그는 종종 도노번과 비슷한 경계인을 그려왔다. <태양의 제국>(1987)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영국인 제이미 그레이엄, <쉰들러 리스트>(1993)에서 나찌와 유대인 사이의 오스카 쉰들러, <터미널>(2004)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공항에 갇힌 빅터 나보르스키가 그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세운 부조리한 장벽을 발견하고, 단단한 그 벽에 작게나마 균열을 내려 한다.


그러나 경계인을 바라보는 스필버그의 시선은 <스파이 브릿지>에서 달라졌다. 이전 스필버그 영화들이 균열 속에서 어떻게든 감동적인 꽃을 피워내려 했다면, 이 영화는 억지로 감동을 짜내지 않는다. 그 대신 도노번이 보호하는 아벨은 모든 상황에 초연하다. “걱정하는 게 도움이 돼요?”라고 말하며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는 일흔이 다 된 스필버그가 전해주는 또다른 삶의 지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실제 사건의 뒷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다행히 아벨은 1962년 스파이 브릿지를 통해 소련으로 돌아간 뒤 첩보부에 복귀해 레닌 훈장을 받았고, 1971년에 죽었다.


http://rayspace.tistory.com/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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