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우스포>
'딸바보' 복서 다시 링에 오르다
나락으로 추락한 권투 선수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링에 오른다. 1931년작 <챔프> 이후 반복해온 수많은 권투 영화들의 줄거리다. 얼핏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커크 더글라스의 <챔피언>(1949), 폴 뉴먼의 <상처뿐인 영광>(1956),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1976), 존 보이트의 <챔프>(1979), 힐러리 스웽크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등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많았다.
실제 권투선수를 모델로 한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제이크 라 모타를 모델로 한 <분노의 주먹>(1980), 무하마드 알리를 그린 <알리>(2001), 제임스 브래독의 일생을 다룬 <신데렐라 맨>(2005), 미키 워드 형제 이야기 <파이터>(2010) 역시 ‘업앤다운’이 분명한 선수들의 삶을 담았다.
온몸에 펀치를 맞고, 눈두덩이에서 피가 튀고, 코너에 몰리고, 쓰러지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서고, 자신을 응원하는 누군가를 통해 힘을 얻고, 숨겨왔던 한 방을 날리고 결국 상대를 때려눕히는 드라마틱한 속성 덕분에 권투는 영화로 옮기기에 좋은 소재다. 영광과 좌절, 속죄와 희망의 희로애락이 사각의 링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때리고 맞는 일차원적인 격투 속에 풍부한 표정 변화는 곧바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에서 그 같은 극한 경험을 하지 않기에 실패를 딛고 극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3일 개봉한 <사우스포>는 이 같은 권투 영화의 공식에 충실한 영화다. ‘아내바보’이자 ‘딸바보’인 주인공 빌리 호프(제이크 질렌할)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다. 예쁜 부인과 딸, 43승 무패 세계챔피언의 명예, 차고 넘치는 부까지. 그와 고아원부터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온 아내 모린(레이첼 맥아담스)은 그의 매니저이자 뮤즈이자 그가 유일하게 믿는 절대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사고로 그는 부인을 잃고 그 여파로 술과 복수심에 빠져 살다가 딸도 집도 빼앗긴다. 동네 건달이 된 그에겐 추락한 챔피언이란 수식어만 남아 주위엔 몰래 수군거리는 사람들만 득시글댈 뿐이다.
인생을 포기하려던 그는 보호소에 격리된 딸이 자신을 만나기 싫어한다는 사실에 충격 받아 재기를 결심한다. 그는 동네 체육관 관장을 찾아가 바닥 청소부터 다시 시작한다. 관장 틱 윌리스(포레스트 휘태커)를 통해 호프는 공격적인 복싱이 아닌 수비 중심의 복싱을 배우게 된다. 때리는 게 목적이 아닌,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는 복싱. 흥분하는 복싱이 아닌, 자신을 콘트롤하는 복싱. 챔피언의 명예를 위한 복싱이 아닌, 딸을 되찾기 위한 복싱이다. 새로운 필살기를 가다듬은 호프는 마침내 링 위에 다시 오른다.
에미넴 인생으로 만든 권투영화
이쯤 되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 싶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 빌리 호프는 권투선수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니다. 전설적인 백인 래퍼 에미넴의 인생 스토리를 사각의 링으로 옮긴 것이다. 실제 딸바보인 에미넴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함께 해온 친구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이를 극복하고 최고의 래퍼가 됐다.
원래 이 영화는 빈민촌의 흑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자라온 에미넴의 인생 스토리인 <8마일>의 속편으로 기획됐다. 에미넴은 주인공 빌리 호프 역할에 캐스팅 됐고 촬영까지 했다. 하지만 에미넴은 음악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했고, 제작사와 마찰 끝에 결국 제이크 질렌할로 교체됐다. 주인공이 바뀌면서 <8마일> 속편의 아이디어도 모두 삭제됐다. 에미넴은 음악 프로듀서로만 남았다. 다만, 영화에 권투 선수 지망생 호피라는 소년이 나오는데 그 소년이 바로 <8마일>의 에미넴의 어린 시절에서 따온 캐릭터다.
영화 <사우스포>의 줄거리는 권투 영화를 몇 편 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 가능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안톤 후쿠아 감독은 전작 <트레이닝 데이>, <킹 아더>, <백악관 최후의 날> 등에서 발상은 신선하지만 만듦새는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사우스포> 역시 기본 이상은 하지만 그렇다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파이터>에 비견될 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2시간 내내 눈을 잡아 끄는 이유는 권투 경기가 주는 시각적인 강렬함과 만국공통어인 부성애에 있다. 다시 링 위에선 아빠가 맞는 모습에 괴로워하면서도 두 손 모아 응원을 멈추지 않는 딸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는 독특하다. 그는 엽기뉴스 사냥꾼을 연기한 <나이트크롤러>에서 기괴한 표정을 지을 때 꽤 음흉해 보였는데 이 영화에선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도 정반대로 순박해 보인다.
권투 선수를 연기한다는 것은 꽤 혹독한 준비를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로버트 드니로는 <분노의 주먹>을 촬영할 때 30kg을 줄였다 늘렸고, 힐러리 스웽크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찍을 때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해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해야 했다. 제이크 질렌할 역시 하루 6시간씩 5개월 동안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는 영화 초반과 후반 전혀 다른 스타일의 복싱을 선보이는데 그의 양면적인 마스크는 이런 변화에 잘 들어맞는다.
원래 제이크 질렌할이 아닌 라이언 고슬링, 브래들리 쿠퍼, 제레미 레너가 빌리 호프 역의 물망에 올랐었다고 하는데 모두들 개성 있는 배우들인 만큼 아마도 전혀 다른 빌리 호프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에미넴의 음악 이외의 사운드트랙은 <아바타>의 영화음악 거장 제임스 호너가 맡았다. 그는 이 영화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개런티 없이 참여했다. 하지만 지난 6월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해 이 영화는 그의 유작이 됐다.
영화의 제목인 ‘사우스포’는 왼손잡이 권투선수를 가리키는 용어다. 원래 야구에서 왼손잡이 투수를 가리키는 단어로 만들어졌다가 이젠 일상에서 왼손잡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