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에세이
작년 10월에 읽었던 뇌과학도서 <스마트 브레인>(데이비드 월시, 2012,비아북) 에 감정기억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사람이 노력 없이도 오래,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감정 기억”이라고 한다. 순간의 강렬한 감정이나 느낌이 동반된 기억말이다.
아이들에게도 어릴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뇌발달에 좋다는 논리와 맞물려있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때 어린 시절의 나에겐 어떤 좋은 감정 기억들이 있었나 회상을 해보게 됐다.
나쁜 감정 기억들은 쉽게 상처, 편견, 선입견, 두려움, 불안함 등과 연결되기 쉽지만 좋은 감정 기억은 평생의 자산이 되기도 하고 삶의 만족도나 행복도, 회복탄력성에도 영향을 준다고 하니 한번쯤 좋은 감정 기억들을 되새겨 보는 일이 의미있을 것 같았다.
(1) 겨울 아침 아빠가 손에 쥐어준 콩을 들고 두부방에 두부 받으러 갔던 기억
동북의 겨울은 거의 매일 눈이 오거나 눈이 녹지 않아 주위가 온통 하얬다. 집 문을 나서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있어 정적 속에 밟으면 뽀드득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코가 빨간채로 두부방에 들어서면 뽀얗고 따뜻한 김과 고소한 두부냄새가 방안 가득 감돌았다. 한족 여자가 챙겨온 그릇에 두부를 담아주면 식을까 품에 꼭 안고 돌아오는 길에 두부가 반쯤 담긴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하고 하얀 두부에 간장을 발라 후후 불어 먹으며 시작했던 무수히 많은 겨울 아침이 참 좋았었다.
2) 겨울밤의 김치 움막
집 앞 마당에 어둡고 깊은 김치 움막이 있었다. 초겨울 김장을 담근 엄마는 움막 안 반듯하게 나열해놓은 장독대에 겨우내내 먹을 김치들을 보관해두었다. 배추김치와 총각김치, 물김치, 깍두기, 나박김치, 열무김치, 파김치 등 없는게 없을 정도로 엄마의 손맛이 깃든 김치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키가 깡충한 장독들 허리께까지 오는 작은 장독 하나가 있었다. 내가 먹을수 있도록 덜 맵게 담근 김치들이 담긴 내 김치 장독이었다.
어두운 겨울 밤, 엄마는 종종 내 손에 손전등을 들려주며 “김치 받으러 움막에 좀 갔다오자~”고 하셨다. 엄마가 사다리를 타고 깊은 움막에 들어가는 동안 손전등을 비춰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밖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엄마 아직이야? 김치 다 꺼냈어? 내 물김치도 좀 꺼내줘~”하며 조르고 있으면 한참 뒤 사다리를 탄 엄마가 무거운 김치통을 쑤욱 내밀었다.
“무겁다. 조심히 받아라.”
달달한 배가 동동 떠있는 물김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였어서 움막에서 나온 엄마와 다시 따듯한 집에 돌아온 뒤 이제 막 김치 움막에서 나와 시원한 김칫물을 꿀꺽꿀꺽 마시면 엄마는 내 등을 두드리며 연신 주의를 줬다.
“아유, 한겨울에 이 찬걸 어쩌자고 이렇게 들이마셔? 이러다 배탈 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채기를 하며 따뜻한 온돌바닥에 배를 붙이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으면 이내 찬기운은 물러가고 깊은 잠이 소르르 몰려왔다. 더없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3) 가축하면 닭이지
어릴때 엄마는 집 앞 마당에 열서너마리의 닭을 키웠다. 수탉 한마리에 암탉 열두마리 정도였던 것 같다.
수탉은 두 마리만 있어도 서로 빨간 벼슬을 쪼아대며 심하게 싸운다고 한마리만 키웠던 것 같은데 수탉은 알도 못 낳고 심지어 고기도 암닭보다 맛 없다고 한다. 헌데 왜 키우나, 암탉이 알을 넣기 위해선 수탉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오오!)
아침마다 엄마는 내가 먹다 남는 밥들을 닭들에게 뿌려주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쌀을 뿌려줬다가 혼나기도 했다.
엄마가 구워주는 달걀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삶아 먹고 지져 먹고 볶아 먹었다. 아침마다 엄마가 “알 좀 낳았나 보고 오련?”하시면 나는 잽싸게 닭장으로 뛰어가 엄마가 정교하게 볏짚으로 만들어놓은 둥지에 손을 뻗었다. 대부분의 날들은 언제나 달걀이 있었다. 가끔 피가 약간 묻은 작은 달걀을 들고 가면 엄마는 드디어 어린 닭도 알을 낳기 시작한것 같다며 반색하셨다.
아주 가끔, 손을 넣으면 갓 낳은 따뜻한 달걀의 온기가 손끝에 닿을때가 있다. 그때면 내 손에 쥐어진 존재가 그자 한알의 달걀이 아닌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지켜주고 싶은 귀한 생명이 내 손 안에 뉘어있는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봤자 몇분 뒤 내 도시락 속 계란 후라이가 되겠지만, 이토록 진기한 경험은 내 눈에 닭이 그저 소모품으로 보이지 않게 했다. 나는 가끔 닭을 끌어안고 털을 쓰다듬었고 엄마한테 혼나도 여전히 엄마 몰래 앞마당에 좁쌀을 뿌려주었다.
특히나 엄마가 가을마다 모아놓은 스무개 정도의 가장 크고 예쁜 알들을 둥지에 넣어 닭이 품게 할때면 난 매일을 손꼽아 언제쯤 노란 병아리가 태어나나 기다렸다. 눈치없는 수탉이 한번씩 둥지 위에 앉아볼라치면 엄마는 가차없이 좇아냈다. 샛노란 병아리는 따뜻한 달갈만큼 소중하고 경이로와서 내 두 손안에 놓고 삐약거리는 그 작고 소중한 것을 한참을 구경하기도 했다. 며칠을 집안에서 삐약거리며 엄마가 만들어놓은 비닐 박스 안에서 좁쌀을 먹으며 자라던 병아리들은 눈 깜짝할사이에 귀여움을 발로 차버리고 칙칙한 색상의 털들을 마구 날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앞마당에서 각자도생을 시작했다. 기존의 닭 들 중에 살이 피둥피둥 찐 암닭들은 닭장수에게 팔려가기도 하고 기름기가 좔좔 도는 삼계탕이 되어 별미로 밥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다.
닭 하면 치킨이라지만 나에겐 그 닭이 따뜻하고 작은 달걀이었고, 삐약삐약 귀여운 병아리었고, 둥지에서 달걀을 품어내던 어미였다는 닭의 인생서사가 뇌리에 남아있다.
그래서 치킨을 싫어하냐고? 안 먹냐고?
그 닭이 그 닭이 아니니까, 하면서 잘도 먹는다.
나에게 닭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동급이다.
4) 서점 책 두권
어릴적 아빠가 월급 날만 되면 자전거 안장에 날 태우고 읍내 작은 서점에 가서 책 두권씩 사주셨다. 그때는 월급 봉투를 받던 시절이라 아빠는 품에 고이 접어두고 몇번이고 잘 있나 매만지며 확인했을 월급 봉투를 꺼내 계산대 앞에서 뿌듯한 표정으로 책 두권 값어치의 돈을 거슬러 직원에게 건넸다. 난 그런 아버지가 자지러질 정도로 너무 멋있었다.
서점에 책이 많지 않아 매달 서점에 가면 나는 매번 새 책이 나왔나 빠르게 눈으로 스캔하며 확인했고 이제 15번만 더 서점에 오면, 이 서점의 책들이 내 서재에 모두 꽂힌다는 것에 세상 다 가진듯 벅차도록 행복했다. 두 권의 책은 한달 내내 마르고 닳도록 읽혀졌다. 아빠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빠는 반해버린듯한 표정과 감탄어린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빠는 세상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딸이 있어서 참 행복해보였다. 누군가가 나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경험은 내게도 벅찰 정도로 황홀한 것이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는것도 좋지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났다니, 존재감이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5) 텃밭의 오이와 토마토
아빠가 집앞 텃밭에 매년 심었던 오이와 토마토엔 농약이 없었다. 학교가 끝나 집에 오면 텃밭에 들어가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옷섶으로 대충 쓱 닦아 먹거나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더라.
가끔 엄마는 “아, 밥하기 싫어.”하고 드러누울때가 있었다.
“너네는 엄마 없으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래?”
엄마가 짐짓 묻자 나와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슬리퍼를 끌고 텃밭에 나가며 말했다.
“뭔 소리에요, 우리에겐 텃밭이 있잖아요!”
오이와 토마토로도 한끼는 충분했다.
난 가끔 진지하게 이런 농담을 한다.
내가 울적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냉장고가 생기고 부터라고. 냉장고안의 김치와 달걀, 토마토와 오이는 각자의 따뜻하고 특별했던 서사를 잃고 그저 소모품이 되고 말았으니까. 사람의 삶은 서사와 좋은 감정까지 함께 먹을 때 풍요로워지는것인데 냉장고는 그저 차갑기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