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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Yoo Oct 09. 2017

실리콘밸리 엔지니어의 하와이 휴가

휴가 5일째, 오늘 아침도 와이키키 해변을 달리고 있고 나의 다리와 허리는 무겁다.  


작년 하와이 휴가 때 말끔히 차려입고 관광 다니는 나와 달리 단출한 차림으로 해변을 달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부러움은 나의 욕망을 보여주는 창구이니, 이번에는 나도 달려보기로 했다. 그래서 매일 새벽 6시 반, 일출 직후에, 그들과 함께 와이키키 해변을 달린다. 좀 더 현지 삶에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다. 덕분에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골목 곳곳을 누비며 뛰어다녔다. 


이번 휴가가 유학 오기 전 공백기와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그땐 친구들 만나고 동네 쏘다니고 운동 (무에타이)하면서 편하게 보냈던 것 같다. 그동안 읽고 싶었지만 읽지 못했던 책들을 쉬엄쉬엄 읽으면서. 이때 프랑스어 입문 책도 읽었다. 비록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그냥 손길 가는 대로.



지난 하와이 휴가 때는 가고 싶은 곳을 많고 휴가 시간은 부족하니 스케줄을 탄탄히 짜서 왔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계획 없이 휴가를 왔다. 아내와 둘이 오랜만에 자전거도 타보고, 느리게 자전거 타는 아내를 놀리기도 하고, 지나가다가 흥미로워 보이는 가게가 있으면 들리고, 호텔 방에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3으로 같이 게임도 하고, 저녁에는 같이 팩 하고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잠드는 이 여행이 즐겁다. 이번이 세 번째 하와이 휴가라서 관광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익숙한 삶의 리듬에서 빠져나와 나의 삶을 재구성해보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다. 책을 두 권정도 읽었지만, 회사 다니던 평소와 비교하면 지적 자극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실리콘 밸리 엔지니어의 삶이라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마냥 좋다. 하와이도 8박 9일로 휴가 왔다. 트위터의 휴가는 무제한이므로 팀에게 휴가 간다고 통보한 뒤 내 편한 날짜에 여행 왔다. 첫 직장의 1년 차 때는 휴가 시간이 일한 시간에 비례해서 주어져서 휴가도 많이 없었고, 일을 열심히 배워야 할 때라고 생각해서 휴가를 그다지 쓰지도 않았다. 두 번째 직장에 옮기고 8개월 차인 지금은 내가 받는 임금보다 내가 회사에 벌어준 돈이 더 많으니 마음껏 휴가를 간다. 다음 달에는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인공 지능 컨퍼런스에 공부하러 다녀올 계획이다. 팀마다 이런 곳에 쓸 수 있는 예산이 있다. 


여행을 와서 사색할 시간이 많으니, 왜 내가 행복한지 생각을 좀 해보았다. 이것이 국가적인 경제의 호황을 겪고 있기 때문인지, 내가 빈곤층에서 중산층으로 진입했기 때문이지, 이웃이 친절한 도심 근교에 살기 때문인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지, 잘 먹어서 나의 육체가 그냥 행복한 건지, 식당에서 한 잔에 몇 천 원이나 하는 음료를 고민 없이 시킬 수 있기 때문인지, A라면 B 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맺는 이 사회적 인간관계들이 좋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행복하다. 그냥 어디서 살든 중산층의 삶은 즐거운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족과 함께한 행복한 기억들이 많다.


일상에서 벗어난 지금의 이 휴가도 좋지만, 긴 휴가 뒤 돌아가서 새로운 배움을 지속할 생각에 즐겁다. 역시 행복하려면 특별한 이벤트에 기대기보단 일상이 행복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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