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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안 Jul 18. 2023

숨비소리

80일의 나그네들

         

  “좀 느리게 살고 싶다.”     


  이 한마디가 우리 여행의 단초였다.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몇 달째 이어지는 야근으로 지쳐가던 남편이 내뱉은 말이다. 늦은 밤 퇴근 한 그는 출근 복장 그대로 침대에 누워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몸에선 삶의 짠 내가 풍겼다. 

늦게까지 아빠를 기다리던 세 살배기 아들이 뒤를 따랐지만 남편은 여전히 누운 채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번쩍 안아 주던 아빠가 오늘은 이상했는지 아들은 말똥 한 눈으로 주변을 맴돌다 침대 곁에 가서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남편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생기를 잃은 지친 눈빛이었다. 그 순간 알았다. 그의 숨이 턱까지 찼다는 것을.     

   

“느리게 살고 싶다고?”    

 

 나의 물음에 아들 머리만 쓰다듬을 뿐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앞 만보며 숨 가쁘게 달려온 그에게 지금은 숨을 쉬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당시 삼십 대 중반을 막 넘긴 남편은 IT 분야에서 일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직장이었고 승진도 빨라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별 보고 나가 별 보고 들어오는 날들이 지속될수록 그의 웃음기는 사라져 갔다. 휴일이면 밀린 잠으로 하루가 다 갔다. 

하는 수 없이 나와 아들도 집에서 붙박이처럼 지냈다. 둘만 나가려니 미안한 마음에 거실을 놀이터 삼아 남편 깰세라 숨죽이며 놀았다. 식탁에는 온기가 사라진 아침 식사가 점심때가 되도록 그대로 있는 날이 많았다. 남편의 방문은 제때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나도 불평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거라고 묵인하며 감당했다. 

오늘을 담보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삶의 순리라고 받아들였다. 그때는 그게 맞는 거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 게 아니었나 싶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틀린 답도 아닐 거라 여기던 날들이다.  

   

 느리게 살고 싶다는 남편 말은 마치 읍소처럼 들렸다. 

도와달라는 메시지로 해석되어 내 가슴에 송곳처럼 박혔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남편의 성품으로 봐서 깊숙한 속내가 튀어나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설령 그 말이 진심이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냐고 이미 답을 내린 듯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있을 수 없어 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밖으로 나갔다. 

올려다본 하늘엔 어두웠지만 별이 빛나고 있었다. 

시동을 걸고 근처 한강공원으로 갔다. 늦은 밤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곧 떠나갈 봄밤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함께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줄지어 달렸다. 뭔가 재미있는 걸 하는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고 활력이 넘쳤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 생경했다. 나는 강가 옆 돌계단에 앉아 빌딩 불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한강 수면을 바라보았다. 뇌리에선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쳤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남편의 말이 계속 떠오르며 나의 결단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세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아들을 껴안고 잠들어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놀란 눈으로 몸을 일으킨 남편은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분간을 못하는 듯했다. 출근할 시간이 되어서 자신을 깨운 걸로 착각했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짠했다.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이 아니었다. 


 나는 남편에게 내일 회사에 사표를 내라고 권했다. 

그리고 처리가 되는 대로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남편은 놀란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남편을 두 팔로 꼭 안았다. 잠시 후 정말이냐고 몇 번을 묻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 그래, 느리게 살아보자 ”     


  남편이 회사를 마무리하는 동안 나도 차근히 준비했다. 

우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보험과 적금을 모두 깼다. 시댁과 친정에도 적당한 핑계를 대고 당분간 연락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우리 여행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들을 정리해야 남편이 머뭇거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가 꾸려가던 일상들을 속까지 뒤집어 살펴보았다. 

최소한의 짐만 챙기기 위한 선택의 시간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많이도 끌어안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정리할수록 아깝기보다 홀가분했고 이전에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미련이 사라졌다. 

이상했다.  쥐고 있던 걸 놓으니 그동안 막연했던 두려움과 걱정이 함께 날아갔다. 모든 게 별 것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어쩌면 남편이 아니라 내가 더 원한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남편에게 고마웠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남편도 아내의 흔들림 없는 일처리를 보며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가족은 긴 여행길에 오르기 위해 새벽바람을 가르며 서울을 떠났다.


 이 여행에는 계획도 목적지도 없었다.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았다. 뭔가를 이루기 위한 여행이 아니기에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흘러 다녔다. 어떤 날은 텐트에서, 어떤 날은 민박집에서 잤다. 

어떤 날은 바닷가에서 밥을 지어먹고 어떤 날은 근사한 호텔 조식을 먹었다. 비 오면 비를 맞고 바람 불면 온몸으로 마주했다. 땀 흘리며 산을 올랐고 고함치며 들판을 뛰었다. 

함께여도 좋았고 각자의 시간도 싫지 않았다.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해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뭉클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완벽한 자유였다. 그렇게 특별하고 싱그러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 달은 금세 두 달이 되었다. 계절은 여름의 정점으로 가고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으로 산천의 녹음이 짙어질수록 우리 마음도 자꾸만 크고 넓은 여백이 생겼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남편과 나누었다. 

그간 내색하지 않은 속내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며 서로의 노력과 인내를 위로하고 다독였다. 잘 버텨주어 고맙다고 등 두드렸다. 남은 생도 곁에서 보듬어 주자고 결기 어린 손가락을 걸었다. 

오늘의 여행을 함께 늙어가며 추억하자고 붉은 노을 아래서 웃으며 약속했다. 

남편의 환한 얼굴을 보니 그가 다시 숨을 쉬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우리 여행은 제주도에서 마지막 열흘을 보낸 후 마침표를 찍었다. 

참,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아니 인생이었다.


 꿈같은 80일간의 전국 일주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우리 가족의 삶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물론 가진 돈은 바닥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는 간단치 않았다. 

훗날 우리 여행을 알게 된 지인들의 놀람은 예상보다 컸다. 사춘기 애들도 아니고 질풍노도의 시기냐며 조롱석인 놀림도 받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남편과 나에게 찾아온 말랑한 변화였다. 

그것이 배짱인지 치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다가올 일들에 대해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80일간 모험 같은 여행을 하며 우린 깨달았다. 내일이 아닌 오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리고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산다는 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즐거운 축제처럼 여겨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으니 된 거였다.

그거 외엔 우리에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질할 때 깊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밖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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