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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배 Mar 02. 2019

눈먼 자들의 세상

넷플릭스 "킹덤"을 통해 다시 회고하는 좀비같은 사람들의 세상

눈먼자들의 세상


우리는 지금 자아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으로 다채로운 것을 보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고, 여러가지 소리를 들으면서 그 소리를 소음으로 치부해버리고,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하기가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몸은 멀쩡하되 스스로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자아상실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은 꽤 지나간 책이지만, "눈먼자들의 도시"라는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 없이 사람들의 눈이 멀게 되고 그런 눈먼 이들의 무리 속으로 남편을 혼자 보낼 수 없어 자기도 눈이 먼것처럼 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 눈 뜬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 본 눈먼 자들의 세상.

<이미지 출처: 책 눈먼자들의 도시 표지>
출처: 눈먼자들의 도시 출판사 서평에서
한 도시에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안 보이는 `실명` 전염병이 퍼진다. 첫번째 희생자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차를 운전하던 사람. 그는 안과 의사에게 가봤지만, 의사 역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자신도 그만 눈이 멀어버린다. 이 전염병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간다. 정부 당국은 눈먼 자들을 모아 이전에 정신병원으로 쓰이던 건물에 강제로 수용해 놓고 무장한 군인들에게 감시할 것을 명령하며, 탈출하려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고 말한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눈먼 자들 사이에 식량 약탈, 강간 등 온갖 범죄가 만연한다. 화재가 발생해 불길에 휩싸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수용소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수용소 밖 역시 썩은 시체와 쓰레기로 가득한 폐허가 되었고, 공기는 역겨운 냄새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악몽의 유일한 목격자는 수용소로 가야 하는 남편(안과 의사)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눈이 먼 것처럼 위장했던 의사의 아내. 그녀는 황량한 도시로 탈출하기까지 자신과 함께 수용소에 맨 처음 들어갔던 눈먼 사람들을 인도한다. 남편, 맨 처음 눈먼 남자와 그의 아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 엄마 없는 소년 등 이름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 눈먼 사람들의 무리를 안내하고 보호한다. 그녀는 폭력이 난무하고 이기주의가 만연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를 책임감으로 받아들이며, 희생과 헌신을 한다. 눈먼 사람들이 서로간에 진정한 인간미를 느끼며 타인과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드디어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아픈 사람들, 아니 사람들로부터 비정상인 사람들로 불리우던 그들의 세상에서 정상인 세상으로 탈출해도 그 세상 역시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비단 좀비 영화들뿐만 아니라 온갖 재난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결말들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만들어 낸 공포는
"그 어느 곳도 안전하고 편안한 곳은 없다."라는 결말이
공통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듯 합니다. 


워킹데드와 언데드


좀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죠.

하나는 워킹데드와 다른 하나는 언데드입니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워킹데드와 죽어도 죽어도 끝없이 다시 살아나는 언데드 서로 같지만 다른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좀비의 열풍을 불러온 것은 "새벽의 저주"에서 좀비들의 습격 이후로 지금은 열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미드 "워킹데드"였겠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좀비물들이 대부분 살아서 움직이지만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본능에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워킹데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스스로 생각도 못하고 의식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존재들인 워킹데드를 없애기 위해서는 머리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무 역할도 못하는 머리를 없애야만 그들을 멈출 수 있다는게
어쩌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모순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대로 언데드는 죽었으되 죽은 존재가 아닌, 일종의 소환술에 의해 죽음으로부터 불려나온 존재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언데드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 1981년 개봉한 샘 레이미 감독의  B급 호러 영화인 "이블 데드"일 것입니다. 악령이 깃든 오른손을 팔뚝까지 잘라내고 그 자리에 장착한 전기톱을 무기삼아 지옥에서 불려나온 저주받은 존재들인 언데드를 다소 코믹한 방법으로 자근자근 처리하는 영화의 재미 때문에 시험 공부도 미루고 VHS 테이프를 되돌려보던 그 당시가 떠오릅니다.
언데드들은 그렇기 때문에 지옥의 힘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조금은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지난 해에 넷플릭스를 통해서 다시 이블데드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 애쉬의 이야기 역시 막강한 힘으로 사람들을 잔혼하게 공격하는 언데드들을 엉뚱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차근차근 처리하는 애쉬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드라마, 애쉬 vs 이블데드>

실제로 넷플릭스에서 유사한 콘텐츠만 하더라도 뱀파이어를 소재로 하거나, 좀비를 소재로 하는 것 외에도 온갖 말세론적 스토리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화면>


이런 비정상적인 존재들과의 처절한 싸움을 그린 스토리들은 비단 넷플릭스에서의 트렌드인 것만은 분명 아닐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넷플릭스 가입자를 늘게 만든 증폭제가 된 드라마 "킹덤"을 보아도 그렇고, 온갖 미디어에서 이제는 이런 좀비물들이 단골로 등장하는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FOX TV  화면, 영화 창궐 포스터>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는 이들을 '괴물'이라고 부릅니다. 

말 뜻 그대로 괴이한 물체인 것이죠. 굳이 워킹데드와 언데드처럼 영어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Uncommon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정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비상식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이미지 출처: 드라마 킹덤 포스터>
드라마 "킹덤"에서는 자신의 딸을 중전으로 앉힌 영의정이 장성한 세자를 대신해서 중전의 몸에서 태어난 후손을 적통으로 만들기 위해서 괴질에 걸려 죽어가는 왕의 목숨을 잡아두어야만 하고, 그래서 온갖 처방이 무효하자 마지막으로 언골에서 자라는 생사초를 짓이겨 침으로 인중혈에 놓아 그 왕을 죽지 않는 괴물로 만든 일에서 시작합니다. 
그런 왕을 진료하러 간 의원의 제자가 왕의 제물이 되어 죽고 그 제자의 사체를 의원에 몰려들어 있던 백성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인육인줄 모르고 나눠먹으면서 그들이 최초의 괴물들로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괴물이 된 백성들로부터 시작된 위협이 결국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 시즌 1의 6부작 내내 긴박하게 진행됩니다.


결국 세상의 진실은 내가 옳다고 믿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워킹데드이건 언데드이건, 아니면 괴물이건간에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들은 그런 외부의 위협적인 존재들보다 스스로 만든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같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협으로 이끄는 나약한 자의 선택이라는 것이 공통된 내용입니다.

스스로가 선택한 의심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약함이 가장 큰 위협이라는 점이 맨 앞 부분에서 인용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와 무엇이 다를까요?


스스로가 진실이라고 믿은 것들이 결국은 진실에서 벗어난 스스로의 맹목적인 관념이라는 것이 어쩌면 스스로를 가장 큰 위협으로 빠뜨리는 요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관념의 테두리에 가둔 채로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매트릭스의 세계인지도 모르죠.



우리가 보고 듣고 믿는 것은 과연 진실일까요?

아니면, 그럴싸하게 우리를 현혹에 빠뜨려 혼란 속에서 방황하도록 만드는 것들일까요?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리고 맹목적이고 편향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만의 오만과 편견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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