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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Aug 19. 2024

63. 일기떨기: 혜은의 밀린일기

이달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마도... “오늘도 놀아?”일 것이다.




 8월은 ‘여름방학처럼 보내는 달’이라고 달력에 적어두었다. 올해 하반기는 지난 몇 년간의 성실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에게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나눠주는 시기가 될 테니까. 8월은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적으면서도 과연... 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웬걸. 틈만 나면 폭염을 가르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놀고 있다. 역시 노는 게 적성에 안 맞는 사람은 세상에 없겠지. 각자의 스타일만 다를 뿐. 이십대처럼 정력적으로는 아니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요즘이 재미있다. 살짝 진이 빠지고 지칠 때 새어 나오는 한숨도 이 즐거움에 일부이겠거니, 하고 편히 내쉰다.      


2024년 8월 12일 월요일

 혜윤이를 보러 원주에 갔다. 서울역에서 1시간 15분이면 되었다. 일산에서 강남에 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4년이 걸렸네.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비로소 좁혀진 거리감에,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 속 ‘윤이나래’ 작명은 우리가 함께 한 시절에 불리던 별명, ‘이혜윤혜은’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알려줄 생각에 설렜다. 

 생활 틈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우리는 각자의 작업이 너무 비대해지지도, 너무 작아지지도 않게끔 유지하는 데에 가장 많은 애를 쓴다. 영영 그림만 그리고 싶다거나, 글만 쓰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이 예전처럼 우세해지지 않는다. 작업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만, 힘들게 모아놓은 순간에 최선으로 집중하고 무진장 행복해하는 서로를 자조하며 털어놓는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면 나중에 도망치기 힘들겠다... 생각한다. 존재가 무언의 약속 같으니까.

 아직 진심이고, 그래서 부끄럽고, 여전히 애가 타는. 이런 서로가 계속되기를 우리는 바란다. 나로서는 이러다 훅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하면 홀가분해지기까지 하는 마음의 부침은 모른 척하고... 그렇지만 너는 거기에 있어주면 좋겠다, 네가 거기에 있어준다면 나도 한 번?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채 다음으로 건너가겠지.

 대화 사이사이, 번개만큼의 실금 너머로 번쩍이는 미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일은 대체로 깜깜해서 꿈의 실마리가 어디에 삐져나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같이 찾아야 하는지도 몰라. 책방을 하는 것이 궁극적인 꿈이라 말한 스물둘의 나도, 동화를 잘 쓴 스물셋의 나도 나 자신보다 혜윤이에게 더 또렷하게 남겨져 있었으니까. 덕분에 이날도 미래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물론 내가 오래 간직하고 돌려준, 혜윤이는 모르는 혜윤이도 있다. 몇 년 뒤의 우리도 비슷하게 놀라고 있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벌써 또 지난주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니까...     


2024년 8월 18일 일요일

 은진이를 보러 광명에 갔다. 오랜 친구들이 전부 동네친구인 터라 친구가 사는 동네에 따로 놀러 갈 일이 살면서 거의 없었다. 여행이 아닌 방식으로, 모르는 동네에 가는 기분이 좋았다. 너무 더웠지만... 사서 고생하는 것에 약간의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란 것을 오랜만에 확인했다. 땀을 한 바가지 흘렸어도 ‘석수역은 구름이 잘 보여서 좋네~’ 하며 12분 거리에 배차된 택시를 취소하고 버스를 기다릴 수 있다.

같이 찍은 인생 네 컷, 내가 준 화분이 조카의 어택으로 아작이 나서 작은 컵에 심폐소생 중인 상태, 함께 본 전시에서 구매한 코스터, 쌓여 있는 편지 등등. 내 방과 작업실도 친구들의 흔적으로 가득한 건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 반대의 입장이 되어 구경하는 마음이 신기하고, 뭔가 뭉클했다. 걔가 자주 끼는 반지들은 이런 선반에 놓이는구나, 악몽을 쫓는다는 식물이 머리맡에 있구나, 턴테이블을 돌릴 부품이 없어 듣지 못한 미니 사이즈 엘피가 있다는 것에서 다음 생일선물 힌트를 얻기도 하고. 

 하지만 친구네 집에 가서 만들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동시에 약간 긴장되는 일은) 애들끼리 (이젠 애도 아니지만) 놀고 있을 때 친구의 가족들이 귀가할 때인데, 친구의 말마따나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으셔서인지 “네가 혜은이구나?” 대신 “어, 혜은이 왔니?”로, “처음 뵙겠습니다”하면 “오랜만이다~”라는 인사가 돌아오는 통에 너무 웃기고, 또(!) 좀 뭉클했다. 

 4인 가족식탁에 앉아서 타코에 콜라 대신 친구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수정과를 마시고, 칠리소스로는 부족한 개운함을 청양고추와 쌈장을 곁들여서 해소하고, 후식으로 친구네 언니가 갖다 준 복숭아를 먹는 일요일 점심이... 이번에는 뭉클하진 않고 그냥 풍족했다. 다시 살아볼 수 없는 시절의 추억 같은 것을 다 커서 재현하는 듯한 순간에 놓일 때가 있는데, 이 기분은 풍족함이 딱 맞다. 

 광명에 왔으니 광명동굴을 구경하는 일정. 가는 동안 입구까지 데려다줄 코끼리열차를 타네 마네 했을 때는 (자식들의 삼십대 이슈로 탈락) 약간 수학여행 같았다. 아버님 차 뒷자리에 앉아서 친구가 부모님께 까부는 걸 귀엽게 지켜보는데 불쑥 “혜은이 너도 이렇게 엄마 아빠한테 독사같이 구니?”라고 물어보시는 어른들의 레퍼토리도 너무 웃겼다... (물론 내 주변에서 나보다 되바라진 딸은 없고 제 친구는 천사입니다...)

 생애 첫 K-동굴탐험을 마친 뒤에는 친구의 언니를 만났다. (광명 투어 아니라 상견례 투어였나?) 언니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것 같다. 둘의 자매력이 부러워지면서 나의 비혈연 자매들 생각이 났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언니가 되어가는 요즘이 좋지만, 역시 막내일 수 있을 때 충분히 막내여야 한다...

 이날 나는 친구네 가족과 세 번 악수를 했는데, 내게 먼저 손을 내밀며 웃어준 분들의 표정이 선명하다. 낯선 가족으로부터 받은 환대가 맑고 경쾌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있을 때 오히려 산뜻한 여름날이었다. 그러니 광명에 가서 무엇이 가장 좋았냐면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마치 거듭 만난 것처럼 반갑게 안부를 나눈 일이라고 할 수밖에! 건강하세요, 또 봬요. 이런 말을 자주 하며 살아야지.


 이달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마도... “오늘도 놀아?”일 것이다. 함께 하라고 여름이 긴 걸까? 남은 계절에도 계속되면 좋겠다. “어제 뭐 하고 놀았어?” 대답하면 “혜은이가 또...”로 끝나는 대화가.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매일을 쌓는 마음』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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