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나를 찾았던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일조시간이 짧아지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정말 그렇다. 6시쯤 창밖을 바라보면 이미 한밤중 같이 어둑어둑하다. 일조시간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지만, 요리를 직업으로 삼으며 한가지 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쌀을 씻을 때 이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물의 온도에 문득 어깨가 움츠러들때, 아 이제 정말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배달왔던 유자에 드디어 손을 본격적으로 손을 대었다. 노란 껍질을 도려내고 채썰어 얼려두고, 남은 부분으로는 유자소금을 만든다. 몇몇 유자는 청양고추와 함께 절여 유자후추(유즈코쇼)를 만들고, 유자 된장도 빼 놓을 수가 없지. 이처럼 유자로는 다양한 보존식품을 만들 수 있다보니 유자가 배달온 날은 김장이라도 하듯 일이 많다. 끝내고 나면 어깨가 욱씬욱씬하지만 이처럼 향긋한 김장이 또 있을까. 이렇게 보관해둔 유자는 기름진 음식, 짭짤한 음식 등으로 자칫 양이 과해지기 쉬운 겨울철에 약간의 음의 요소를 더해주는데 도움이 되는 재료이기도 하다
혼자의 유자김장을 마친 뒤 먹는 혼자의 스탭밀. 갓 만든 유자된장으로는 친구들에게 내어주고 남은 쑥갓과 버무려 나물을 만들어 본다. 역시 친구들에게 내어주었던 콜리플라워 구이를 만들고 남은 녀석으로는 콜리플라워 포타주를, 유자즙과 껍질로 상큼하게 만든 봄동 볶음에는 구기자로 색감과 단 맛을 더한다. 겨울철이니 밥에는 톳을 곁들여도 어울리지. 콜리플라워 포타주에 핑크페퍼와 파슬리를 올리니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같다.
하루를 유자로 노랗게 불태웠는데, 아뿔싸 이번엔 레몬이 온다. 무농약 제주레몬을 배달시켜 둔 것을 깜빡하고 있던 것이다. 하루 더 노랗게 불태울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 양으로는 나의 튼실한 팔뚝과 칼이 코웃음을 친다.
마크로비오틱을 실천하며 나를 고민스럽게 했던 재료중 한가지가 바로 이녀석 레몬. 이 녀석을 사용하고 싶은 레시피가 한둘이 아닌데 국산은 커녕 유기농을 찾기란 하늘에 별따기 였다. 수입산 관행재배인 것은 둘때치고 왁스 코팅이 되어있을 것을 생각하면 백화점 지하, 마트 등에서 파는 레몬에는 도무지 손을 대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몇년 전쯤부터 겨울철이면 제주산 무농약 레몬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레몬을 구할수 있는 철에는 유자를 다듬듯 레몬을 다듬어 레몬필이나 레몬소금을 만들고는 두루두루 사용한다. 이렇게 재료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재료 덕에 요리의 폭이 넓어질 때마다 결국 농업에 답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자연스러운 재료만으로도 다양한 맛과 향을 내며, 건강한 음식을 혀 끝에서 즐기기 위해서는 매일 같은 식단만 먹으며 살 수는 없기에, 다양한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레몬을 다듬고 몇가지 밀렸던 일을 하다보니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식사는 작업실에서 한다. 레시피를 수정할 겸 만든 유부주머니 나베. 나베를 만들기 위해 사둔 미나리로는 찬장속 미역, 호두와 버무려 반찬을 하나 만든다. 그리고 남아도는 유자와 함깨 재워둔 무 소금 절임과 어제 만들고 남은 톳밥. 남아있는 재료들로 만들었을 뿐인데 미나리미역무침이 무척 잘됐다. 재료의 궁합으로 보았을 때는 초봄쯤에 더 잘 어울리겠다. 혼자 먹기 아쉬워, 집으로 챙겨가 가족들과도 나눠 먹었다. 내가 집에 없으니 우리집 반찬 레퍼토리도 다시 원상복귀 됐을 터. 마침 잘됐다.
일조시간이 짧아졌다는 이야기를 한지 몇일 지나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 말이 정말 맞았다. 곧 동지가 가까운 날이었다. 1년 중 가장 해가 짧은 날. 마크로비오틱의 음과 양으로 보았을 때에는 가장 음이 강한 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음이 강한 날 죽 중에서는 양성의 팥죽을 먹었던 것 또한 조상들의 지혜다. 단, ‘단팥죽’이 아닌 ‘팥죽’을 먹을 것. 요즘 시중에 파는 팥죽은 죄다 주스인지 시럽인지 모르게 달아, 두 숟갈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더라. 그냥 팥과 물, 약간의 소금만으로도 팥 본연의 달콤함을 즐길 수 있는데, 왜 이 우아한 맛을 설탕이며 감미료로 숨기는지...참 아쉽다. 이런 생각으로 약불에 보글보글 팥을 익히고 현미를 곁들여 마크로비오틱 현미팥죽을 만들어 본다. 그냥 불에 얹어두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세상 간편한 팥죽이다. 여기에 새알심을 곁들일 약간의 수고정도만 더해주자.
지난날 늦은 시간까지 작업실에 있었는데도 다시 작업실을 찾은데에는 이유가 있다. 월말에 앞두고 있는 새 베이킹 클래스의 모의 클래스를 해보고자 시간을 비워뒀다. 마들렌20여개와 비스킷 여덟개를 구우니 작업실이 달콤한 향으로 가득하다. 미국 동화속 어린이 집에서는 이런 향이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마침, 만날 사람이 많으니 지인들과 나누고 반응도 들어볼 수 있어 일석이조.
마들렌과 비스킷을 나누어 준 한 사람은, 조금은 늦어진 저녁시간 작업실을 찾아준 소녀. 팝업식당을 하던 시절, 예약을 하고 식당을 찾아와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카운터 자리에 앉았던 친구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요리를 하고 싶은 것은 맞는데, 아직은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자신의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래서 무엇부터 손을 대야할지 조금은 답답해 하던 참에, 우연히 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도와줄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달라며, 오히려 배우고 싶다는 발언에 나를 당황하게도 했다. 많은 것을 정제하고 깎아낸 어른들의 대화에 익숙하던 나에게 그녀는 ‘날 것’이었다.
무상으로 일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주일에 두번만 영업하는 식당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에는 무엇부터 부탁해야 할지도 난감했기에, 그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그녀에게서 나와 지향하는 방향이 같다는 것 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서너달은 지났을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그녀를 나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작업실로 초대했다. 저녁시간에 학교가 끝난다니 작업실에 있는 재료로 조촐하게나마 저녁식사를 차려본다. 단단덮밥과 채심유부깨무침, 마요네즈 없이 만든 적채 코울슬로, 무 유자절임과 콜리플라워 포타주.
단촐한 저녁식사를 나누며 그동안의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신기하다. 서로 다른 지역, 환경에서 살아온 두사람. 나이 차이도 적지 않다. 이렇게 평행선과도 같은,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사람 모두 자연스러운 먹거리를 통한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있다. 술, 커피 한잔 없이 그저 마크로비오틱을 생각하며 차린 밥상을 나누며 우리는 꽤나 들뜬 상태로 대화를 이어갔다.
후식으로 내가 만든 마들렌, 비스킷과 소녀가 가져다 준 유자차를 나눠 마셨다. 직접 키우고 따고 손질해서 만든 유자청. 직접 키우고 딴 만큼, 재료가 가진 성질, 재료가 자라는 환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나이 때에 재료에 대해 이만큼 알고 있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토마토가 어느 철에 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진정 farm to table 한 티타임을 가지며, 기대되는 소녀의 미래가 내심 흐뭇했다. 홀로 손질한 유자도 사랑스러웠지만, 함께 나눈 유자청은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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