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다녀간 뒤, 냉장고에 먹을 것이 넘친다. 튀김을 해 기름을 왕창 쓴 김에 이것저것 튀겨두어서도 그렇다. 오전 베이킹 수업이 끝난 뒤 먹는 조금은 늦은 점심. 튀김에 파래와 두부로 만든 타르타르 소스를 곁들이고, 누룩소금에 재워둔 두부와 각종 반찬을 곁들여 점심을 차려 먹는다. 튀김에 타르타르 소스의 조합은 썩 좋지 못하지만 그래도 논오일이니 봐주는 셈 치기로...
이번주 마크로비오틱 쿠킹클래스에서 함께 김치를 담글 예정인지라 오랜만에 김치를 담가본다. 수업 당일에는 내가 미리 담가둔 김치를 맛보고, 당일 담근 것은 집으로 챙겨가 발효시켜 드시게 끔 할 예정. 식당을 하던 시절, 젓갈과 감미료 없이 어떻게 이런 맛이 나냐며 궁금해 하시던 그 김치를 드디어 쿠킹클래스에서도 선보인다. 직장, 일상, 육아 등으로 바쁘게 지내며 매일 요리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분들이 많으니, 한번 만들면 두고 두고 꺼내먹을 수 있는 밑반찬을 수업에서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김치는 특히나 오래가니 냉장고속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김치는 한번에 많은 양을 만들기도 하니, 수업에서 배운 김치를 직접 만들어 주변에 나눠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작업실에 활기가 넘친다. 조카와 조카의 사촌이 나의 작업실을 찾아주었다. 먼 곳에서 찾아준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요리 선생님 이모가 키즈베이킹 수업을 해주었다. 6, 7살 쯤 되니 쿠키와 머핀은 버터와 밀가루, 설탕으로 만든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오늘 만드는 쿠키와 머핀은 버터, 유제품, 설탕, 흰 밀가루 없이 현미가루, 무첨가 두유, 현미유, 쌀조청 등으로 만든다니 처음 만난 조카의 사촌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조카는 우리 이모는 채식주의자라 그렇다며 자랑스러운 듯 반응한다.
앞치마는 없지만 머리에 수건을 둘러주니 제법 그럴 듯 하다. 직접 흑임자로 강아지 쿠키에 눈을 달고 아몬드 슬라이스로는 귀도 달고. 머핀에는 레몬껍질, 깨, 당근으로 자유롭게 토핑도 해본다. 곱게 채썰어둔 레몬 껍질을 신기해 하며 직접 맛을 보고 ‘레몬 껍질은 레몬살이랑 맛이 조금 다르네요?’ 라며 감상을 말하기도 하고, 강아지 코가 될 건포도를 날름날름 집어 먹기도 한다. 색소, 설탕 가득한 스프링클이 아닌, 자연스러운 유기농 재료들이니 아이들이 맛을 보고 집어 먹어도 안심이다. 채식주의자 요리 선생님 이모는, 회사원 이모보다 조카들에게 인기쟁이가 될 듯하다.
2019년의 마지막날. 지난날 어린이들이 휩쓸고 간 흔적을 정리할 겸, 작업실을 찾아 작업실에서는 2019년 마지막 밥이 될 식사를 차렸다. 오메데또와 배추곶감샐러드, 달래초된장무침, 누룩소금 두부. 오메데또는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축하해’. 마크로비오틱의 전통적인 레시피로, 큰 병을 이겨낸 사람에게 차려주는 식사이다. 큰 병을 이겨낸 것은 아니지만, 올 한해를 무사히 지내오고, 충분히 행복함이 가득했지만 팝업식당을 그만두고 새출발을 한 나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식사로 이 오메데또를 차려주고 싶었다.
2018년도 다사다난했지만, 2019년도 2018년 만큼이나 많은 일이 있었다. 모교 리마의 사범과정을 마치며 정식으로 프로로서 마크로비오틱을 알리는 1인이 되었다. 또한 2018년말에만 해도 ‘설마 정말 내 책이 나오겠어’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던 나의 책 ‘내일을 생각하는 오늘의 식탁’이 세상밖으로 나왔다. 우연한 기회에 JTBC ‘취존생활’ 마크로비오틱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18년과 마찬가지로 팝업식당을 운영하던 매일이었다. 좋아하는 DJ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놓은 채, 상수동의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영업준비를 하던 순간들이 행복했다. 연두색 완두콩을 홀린 채 바라보기도, 보라색 비트로 손을 물들이기도, 한밤중까지 고춧잎을 손질하기도 했다. 직장인이었다면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갈 30대 초반에 나 자신의 인건비까지 생각하면 남는 것이 없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지만, 순수하게 행복했다.
요리를 취미로 즐기던 시절, 요리를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냐는 지인의 질문에 ‘제 음식은 상품가치가 없어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요리를 업으로 삼기로 한 뒤에도 이 생각은 마음 속 한자리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요리사 본인이 상품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음식을 먹으러 찾아와주는 손님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몇번이고 다시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스스로도 놀랐다. 2018년 겨울에는 오픈발에 힘입어 친구들이 매출을 올려주기도 했지만, 2019년에는 친구들의 발길은 끊기고 30여년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분들이 나의 음식을 먹기 위해 상수동의 작은 식당을 찾아주었다. 다시 찾아주고 격려 해주는 손님들이 있어, 마크로비오틱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내 또래의 소비자들이 흥미를 갖고 즐겨 찾는 음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팝업식당을 접고 한달이 지났고 아직도 만들어 보고 맛있는 음식은 ‘식당에서 내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나의 팝업식당 ‘오늘’의 정규영업은 이미 끝났다. 내가 팝업식당을 하던 ‘프로젝트 하다’ 역시 2020년 3월이면 역사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때문에 내가 다시 팝업식당을 할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다. 하지만 아쉬워하기 보다는 아름답게 기억하기로 한다. 몇 십년 뒤에도 2019년에 대해서는 웃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때 상수동에서 식당을 했었다고. 매주 메뉴를 바꾸는데 자주 찾아주시는 손님들도 많았다고. 그 때 그 식당에서 한 경험이 마크로비오틱 요리 선생님 전혜연의 초석이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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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