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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an 13. 2023

제대로 상처받지 못하고

계속 덧나는 날들을 살아가야 한다면

시작부터 불안했다. 차마 티 내지 못했지만 내내 긴장했다. 계속해서 상처받으면서도, 불편함을 말없이 꿀떡꿀떡 삼켰다. 이미 균열이 일었다 해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까 봐서. 되려 그런 마음이 더 빨리 파국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역시나, 일어날 일은 일어났을 것이다.




영화 <드라이브마이카>는 제 때에 제대로 상처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달리 너 나은 방법을 몰랐을 뿐인데, 이제 더 이상 화를 낼 수 조차 없어져버렸다. 완벽하게 매력적이었지만, 계속해서 바람을 피우던 아내는 말도 없이 죽어버렸고 나는 남았다. 유일한 보호자였으나 폭력을 일삼던 나약한 엄마를 떠났지만, 유일한 친구도 잃었다. 원망과 자책과 후회가 뒤엉킨 고통만이 내 곁을 지킬 뿐이다.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빠르게 말했다면 나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무엇이 최선이었을까. 아무리 복기해 봐도 알 수가 없다.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저 갈지 자로 주어진 삶을 말없이 버텨갈 뿐.


그러나 문득, 고통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느껴진다. 미뤄왔던 눈물이 복리로 차오른다. 느리게 주저앉는다. 앉은 채로 몇 번이고 고요하게 무너져 내린다. 오랫동안 최악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은 상상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나는 이토록 무지했구나. 당신도, 나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구나.




비로소 고통을 마주해도, 괴로움은 여전하다. 나를 알아차렸대도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고 흘러간다. 잠시 괜찮은 듯 보여도 한순간에 길을 잃고 무너질 것이다. 한동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슬픔의 응어리를 만지작거리며 끅끅 울게 될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어느 따뜻한 품 속에서, 다정한 말속에서 잠시 안녕하면 좋겠다.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텅 빈 내 몫을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대체로 외롭고 괴로울 걸 알면서도, 부디 그런 순간이 종종 찾아오기를 바라게 된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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