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날 출장 통보를 받은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의 여름휴가를 끝내고 회사를 출근했다. 밀린 업무를 하나씩 정리하며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고 있는데 회사에서 들은 상사의 첫마디에 당황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내일 제주 출장 가야 돼.”
“네…? 갑자기요…?”
이번 클라이언트가 제주에 있어 언젠가는 제주에 가리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하루 전날 갑작스러운 통보는 누구나 당황스러울 거다. 제주도가 어디 바로 옆 동네도 아니고. 비행기 타면 한 시간이면 간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제일 끝에 있는 섬인데 그걸 하루 전 날 얘기해주다니.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요?”
“오전 10시 미팅이야.”
“네…?”
그러고 미팅 시간을 듣고는 또 한 번 놀람. 다음날 오전 10시 제주 미팅을 그 전날 얘기해주는 게 무슨 상황이냐고요. 다른 직원들도 다들 당황해서 어이없음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뭐 이렇게 된 걸 어떡하겠나. 하루 전 날 일정을 바꿀 수도 없고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잡힌 일정 제대로 진행해야지. (대신 나의 당황스러움은 어떻게든 표현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정말 다 되는 줄 아니까.)
그래도 다행히(?) 비행기표는 예매를 해두셨다고 한다. 그럼 비행기표는 안 끊어도 되니 패스. 내일 업무를 미리 당겨서 해두고, 내일 해야 하는 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다 정리도 하고. 내일 도대체 아침에 몇 시에 나와야 하는 거지? 미팅이면 거지 같이(?) 하고 나오면 안 되니까 준비할 시간도 필요할 테고.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졌다. 아무리 전국 1일 생활권이라 하지만 제주행은 어쨌든 마음의 준비도 필요한 건데, 이렇게 급 제주행은 처음이다. 회사 생활이란 언제나 늘 다이내믹하고 새롭다. 도무지 적응할래야 적응이 안 되는 거. 내가 바뀌어야지 뭐.
다음 날 새벽 5시 기상. 늦잠 잘까봐 긴장하고 잤더니 잠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공항버스 시간에 늦지 않게 일찍 집을 나섰는데 뭐라도 떨어지지 않으면 이상할 날씨. 그리고 잠시 후에 역시나 예상한 대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응? 일기예보에는 비 소식은 없고 그냥 구름이었는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올여름 들어 내가 만난 가장 세찬 소나기가 주룩주룩 내린다. 아니 이러기 있나요? 멀리 떠나는 날 새벽 댓바람부터 비라니요. 덕분에(?) 나름 곱게 단장한 거 무소용이 되어가고 있고. 그래도 제주행인데 날씨까지 안 따라주면 너무 슬프잖아. 망했다는 생각에 김포공항으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오늘 하루 제발 무사하자’ 생각하며 쪽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김포공항. 함께 출장을 떠나는 상사를 만나 가볍게(?) 한 마디 했다.
“아니 오늘 출장인데 어제 얘기해주면 어떡하나요.^^”
“아~ 원래 지난주에 일정이 잡혔는데 얘기하는 걸 깜빡했어~”
뭐라고요? 깜빡했다고? 와우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말이야... 그래도 나의 당황스러움은 알렸으니 안 좋은 소리는 더 할 필요 없을 것 같고. 같이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는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벽부터 퍼붓던 비는 다행히 소나기였는지 그쳤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니 여행 가는 기분. 역시나 비행기 이륙은 괜히 설레고 기분이 좋다. 뭐 이왕 제주에 가는 거 오전 미팅 빨리 끝내고 남은 시간 혼자 여행이나 즐기고 와야지 하는 즐거운 마음을 먹었더니 기분도 좋아진다.
미팅 이야기는 오래 하지 않아도 되니 패스! 다행히 미팅은 오전 중에 끝이 났다. 그래도 제주에 왔으니 맛있는 걸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상사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점심으로 흑돼지 맛집을 찾았다. 역시 남의 돈으로 먹는 밥이 제일 맛있는 거 아닙니까! (물론 상사와 함께 먹는 밥이라 최상의 맛은 아니었지만)
지인이 알려준 맛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또 다른 지인이 알려준 카페에 가서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또 제주에 온다면 꼭 먹어볼 거라고 생각했던 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이야. 제주 도착하고 보니 파랗고 맑은 하늘이 여행을 즐기기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몸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바로 서울로 올라가는 거 너무 아쉬운 거 아닌가. 피곤하더라도 내일 퇴근 후에 집에서 기절하면 되는 거고, 오늘은 오늘의 제주를 즐기자라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시간대로 예약을 했다. 이젠 상사와 헤어질 시간. 오롯이 나만의 제주를 즐길 일만 남았다. 제주로 출장 온 김에, 세 달 만에 다시 또 제주 여행이다.
지난 제주 여행 때 아쉽게 못 갔던 애월을 가보기로 결정했다. 어딜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곽지해수욕장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있어 거기로 목적지를 정했다. 공항 근처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으니 애월로 가면 약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급 출장이었지만 이렇게 또 바다를 보러 오게 될 줄이야!
서둘러 애월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기예보가 내내 흐림, 비였어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오늘의 제주 날씨는 맑음이다. 덕분에 맑은 제주를 실컷 즐길 수 있었다.
버스 타고 애월로 가는 길에도 드라이브하는 마음으로 주변 경치를 즐기며 이동하다 보니 벌써 내가 찜해둔 카페가 있는 정류장 도착이다.
정류장에 내려 카페를 찾아가는 길에 푸르게 펼쳐지는 곽지해수욕장 전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다를 보면 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나는 발걸음이 끌리는 곳을 따라 해수욕장으로 걸어갔다.
늦여름이었지만 아직 해변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다.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햇빛이 쨍쨍이라 덥고 뜨겁긴 했지만 바다에 왔으니까! 사진도 마음껏 찍고, 잠깐 앉아 에메랄드빛 제주 바다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지난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그때 제주에 와서 힘든 거 훌훌 털어버리고 힐링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다시 또 여기 있는 게 새삼 낯설고 신기했다. 역시 제주.
잠깐 바다를 즐기다가 애월 빵공장으로 걸어갔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찜하고 찾아온 이곳! 빵과 음료를 주문하고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디저트를 먹고 있으니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비행기 시간도 아직 남아있고 내 앞에 바다는 촤락 펼쳐져 있고. 그렇게 거기 앉아 파아란 바다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올해 초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나에게 주는 두 번의 제주 여행. 급 출장이긴 했지만 이렇게 와서 또 바다를 볼 수 있으니 나에게는 전혀 나쁠 이유가 없는 것!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이나 카페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은 참 좋았다.
그리고 다시 떠나야 하는 시간. 하루 만에 오가는 일정이 참 빡빡하고 아쉽다. 긴 하루를 보내고 다시 돌아가는 길.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을 하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노을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아쉬운 마음에 자꾸 하늘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공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탑승구를 찾아 가는데 눈 앞에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쪽 바다로 해가 떨어지는 일몰의 시간. 빨갛고 동그란 해를 마주하니 그 풍경이 참으로 경이롭다. 일몰 풍경에 반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창에 착 붙어 저마다의 모습으로 일몰을 감상했다. 오늘 긴 하루를 보낸 나에게 보여주는 선물 같은 풍경에 감격과 감동이 몰려온다.
비록 급하고 짧은 일정에 몸은 피곤하긴 했지만 이번 출장에서의 제주의 하루는 아마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까지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