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생리를 기다려 본 적은 처음이다.
왜냐면 힙한 페미니스트라면 꼭 써봐야 할(!) 생리컵이 드디어 지난달 집으로 왔거든.
면생리대를 사용한지도 어언 4년. 면생리대가 익숙해져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고, 만족했던 터라 사실은 굳이 '무서운 생리컵'을 몸 안에 넣고 싶진 않았다.
그동안 생리컵에 대한 숱한 간증을 들어도 시큰둥했던 나를 생리컵의 세계로 이끈 건 생리컵의 장점 중 단 한가지였다.
생리기간이 줄어든다
과연 맞는 말일까? 한 달 중 생리기간이 일주일이나 되는 나는 오직 이 궁금증 때문에 생리컵에 도전하게 됐다. 생리 기간이 단 하루라도 줄어들 수 있다면!
마침 친한 지인이 가장 좋은 생리컵과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인터넷 프로모션이나 쿠폰 등을 검색해보고 사면 개당 3만원 가량에 살 수 있다)으로 레나컵을 함께 구입해줬다.
그리하여 배송대행비 포함 6만원 중반에 레나컵 센서티브 M, L 두 사이즈를 선택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레나컵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레나컵은 검색해 본 많은 생리컵 중에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왕이면 분홍색과 녹색을 사고 싶었는데 지인의 서칭 결과 초보자는 생리컵이 몸 속에서 '팡 하고 펴지는 느낌' 을 무서워 한다기에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반투명의 센서티브(과격한 신체활동을 할 때엔 일반 생리컵을 쓰는게 더 좋다고 한다)를 선택했다.
다시 한 달을 기다려 드디어 생리컵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것이다.
레나컵 센서티브(조금 더 비싸다). 별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색이 없으니 좀 밋밋하긴 하다.
사용법은 은하선 작가의 설명이 가장 큰 도움이 됐다.
펀치다운으로 접으니 컵의 입구가 겨우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굵기가 되어 삽입도 쉬웠고 첫 사용땐 별 이물감 없이 뽀송한 시간을 보냈다.
근데 몇 번 써볼수록 생리컵이 안에서 늦게 펴지거나 잘 안펴지면서 혈이 조금씩 새는 낭패도 있었다(많이 새진 않았지만, 불안하면 라라문 팬티라이너처럼 매번 갈지 않아도 되는 얇은 패드 한 장 속옷에 붙이면 된다. 물론 제 아무리 라라문이나 나트라케어라도 통풍을 위해 팬티라이너도 안 쓰는게 좋다).
가장 힘들었던 건 많은 사람들의 후기에서 봤듯이 생리컵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손톱을 짧게 깎는 편인데도 손톱 끝이 굉장히 까칠하게 느껴졌고(이건 생리가 끝날때까지 적응이 안됐다), 공기를 뺀다는 것에 대한 감각도 없어 컵을 충분히 누르지 않고 꼬리처럼 달린 부분만 잡아당기다 15분 동안 긴 사투를 벌이고서야 겨우 빼낼 수 있었다. 긴장만 빼면 될 것을 잔뜩 쫄아서 잠시 병원에 가서 빼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지만, 한 번 경험하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능숙해 진다.
생리컵을 접는 대표적인 세가지 방법. 펀치다운이 잘 안 펴지면 혈이 새기도 해 두가지 방법을 시도하긴 했는데 아직 삽입이 잘 안된다.
그렇다면 생리컵은 정말 생리기간을 단축시켜줄까?
결론은 맞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지만, 보통 이틀정도 줄었다는 후기를 많이 봤는데 나는 7일에서 3.5일로 줄어들었으니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다.
기분탓인진 몰라도 생리 기간동안 먹었던 진통제의 양도 1/3정도로 줄었으며 웬만한 진통제로 회복이 안되던 통증과 컨디션도 확실히 좋아졌다.
그래도 단 일주일만으론 생리컵이 영 익숙해지지 않아 삽입과 제거가 꽤 긴장되었다.
면생리대를 사용했을 땐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며칠동안 담궈두었다 한 번에 세탁기에 돌리고 한 번 삶아주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는데, 이 과정이 꽤 귀찮은 일이란 걸 느끼게 됐으니 정말 편리하기도 하다.
생리컵은 흐르는 물에 닦아주면 되고 그 달의 생리가 끝났거나 기분 상 찝찝하다 느껴지면 물이 담긴 머그에 넣고 전자렌지에 돌려서 간편하게 소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릴리안 사태 때 생리양이 줄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번 3.5일동안 일회용 생리대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결과 내 생리혈의 정확한 양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내가 내 몸에 무지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생리컵을 사용하는 건 아직 무리다. 생리컵을 하고 밖을 돌아 다녀본 결과, 손을 깨끗이 씻고 생리컵을 꺼낼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이 갖춰진 화장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내가 남들보다 결벽증이 심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지하철역 공용화장실의 봉에 달린 공용비누로 손을 씻고 삽입과 제거를 하기엔 너무 찝찝하다)
그래서 한번은 택시를 타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 제거하기도 했다. 만약 만족스러운 시설이 갖춰졌다 한들 피크타임의 화장실에서 많은 인파를 뚫고 피 묻은 생리컵을 들고가 씻어서 다시 줄을 서고 들어갈 용기도 나지 않는다.
보통 밖에선 물을 담아둔 컵과 갈아 낄 수 있는 생리컵 한 개를 더 가져간다고 해서 생리컵 두 개를 사긴 했지만, 회사에서도 참 번거롭고 시도하기 힘든 일이긴 하다.
아직 능숙하게 생리컵을 사용하지 못하는 첫 사용자가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기도 하고. 이게 생리컵 초보가 겪은 유일한(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러니까 생리컵, (단시간 외출과 집에서 만큼은) 안 쓸 이유가 없다.
(자, 감당이 안되는 만큼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생리대를 직구합시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