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해 Jan 14. 2020

노트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쓰는 일.

연해

쓰다가 만 노트가 여러 권이다.

매번 첫 장을 펼칠 때는 온갖 다짐으로 더 예쁘고 꼼꼼하게 채워야지라며 야심 차게 굴곤 한다. 하지만 절반도 쓰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고 때로는 고작 서너 장을  끄적여놓고 언제 그런 굳건한 다짐을 했던가 불타는 야심을 품었던 가 까마득하게 잊은 채 책꽂이에 꽂혀버린다.

그렇게 먼지를 집어쓰고 있는 노트가 여러 권이다.

.

몇 장 쓰다가 지루해지면 새 노트에 자꾸 눈이 간다.
그동안 틈틈이 모아둔 노트들을 밤마다 쭉 나열해놓고 어떤 것을 고를까 고민한다. 선뜻 투명 비닐을 뜯지 못하고 며칠씩 이 노트 저 노트를 들었다 놨다 어루만지기만 한다.

요즘은 쓰다가 중간에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처음 계획과 달리 글씨들이 예쁘게 써지지 않았어도 뜯어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어도 그냥 꾹 참고 끝까지 써보려고 노력한다.
자꾸만 새 노트에 눈길이 가지만 몇 장 끄적여 놓고 버려둔 것을 생각하면 첫 마음이 아무리 크고 결심이 대단했어도 끝까지 써서 마무리하는 마음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나의 삶도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도 이렇다.

중간중간 찢어 버리고 싶고 쓰던 노트를 책꽂이 귀퉁이에 숨겨두고 새 노트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처럼 말이다.

.

지루함을 견뎌내고 서로 다름을 이해하며 잘 마무리해서 삶의 노트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쓰는 일.

.
또박또박 써진 글씨도 있겠고 삐뚤삐뚤 갈겨쓴 글씨와 서 가득한 페이지도 있겠다. 예쁜 스티커와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꾸며진 페이지도 있겠고 마시다가 엎지른 커피 얼룩이 남은 곳도 있겠다. 기쁨과 행복한 단어로 채워진 이야기가 있겠고 슬프고 분노와 좌절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

눈물자국 남은 페이지는 찢어버리고 팽개쳐 버리고 새 노트로 자꾸만 마음이 가게 만들 것이다. 그래도 마음을 붙잡고 마지막 장까지 쓰는 일.

.
나는 용케  2019년 12월 31일을 끝까지 썼다.
2020년 새 노트를 꺼낸 지 며칠이 지났다. 아직 몇 페이지 쓰진 못했지만 작년에 썼던 노트보다 더 인내심과 진득함을 가지고 쓰고 싶다. 지난번 노트보다 덜 자책하고 더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 싶다. 또 찢어버리고 싶은 페이지가 생길 테고 몇 번씩 새것으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이번에도 그냥 끝까지만 써보자.

.
그것이 2020년 나의 새해의 소망이고 다짐이다.




.

#연해 #에세이 #노트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쓰는 일

작가의 이전글 동네 책방에 발길을 머문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