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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너지 Nov 28. 2020

휠체어 탄 스페인 여행에서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2

1편 https://brunch.co.kr/@wonjilee29/9
구엘공원을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없는 지하철, 급경사, (심지어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뚫고 왔다. 그 과정에서 받았던 도움을 기록하였다.


엘리베이터 없는 지하철, 급경사, (심지어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뚫고 올라간 구엘공원은 우리가 아는 그 구엘공원이 아니었다. 눈 앞에는 가우디의 아름다운 건축물 대신 등산로가 펼쳐졌다. 원래 이런 건가 싶어 갸우뚱하는데 구글맵은 이 길을 계속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려면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내려가야 했다)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향했다. 다행히 길이 많이 가파르지 않았고 계단도 없었다.  


좀 더 올라가자 길 옆으로 바르셀로나 시내가 조금씩 보였다. 우와 뭐지? 나무에 가려졌던 풍경이 점점 드러났다. 해질녘, 붉게 물든 바르셀로나 전경이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그 어려운 길을 올라왔나 싶을 만큼. 남자친구와 손을 꼭 잡고 시내를 내려다보며, 같이 힘든 길을 올라와준 남자친구와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최고의 순간

진짜 구엘공원은 그로부터 한참 걸어야 했다. 흔히 이야기하는 진짜 구엘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상태였다. 게다가 메인 포토존은 공사 중이었고 그나마 공사를 안 하는 곳은 휠체어로 접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방이 어두워진 상태였고 곧 공원 폐장할 시간이라 우리는 잔뜩 흔들리고 눈 감은 사진만 몇 장 남긴 채 공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원을 입장하면서 받은 가이드 책자를 보니, 우리는 메인 출입구가 아닌 아주 이상한 길로 돌아왔었다. 아래 지도 사진에서 노란 부분이 구엘공원이고 정면에 출입구가 있는데, 우리가 온 길은 좌측부터 시작되어 구엘공원 뒷산을 굽이굽이 뚫고 오는 코스였다.

이미 어두워진 구엘공원,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 구엘공원 지도, 정문으로 나왔을 때의 쭉 뻗은 포장도로

겉으로만 보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구경은 제대로 못 한 날이었다. 그러나 내게 이 날은 스페인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우리가 택시를 타거나 정문으로 편하게 왔어도 공사 중이거나 휠체어로 들어갈 수 없는 탓에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을 거고, 그럼 구엘공원에 안 좋은 인상만 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길로 돌아간 덕분에 이런 날 함께 있어준 남자친구의 소중함, 그리고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건 나 혼자가 아닌 나를 도와주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란 걸 다시 느껴서 마음은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우리는 정문으로 나와 직선으로 쭉 뻗고 깨끗한 포장도로를 내려왔다. 누군가 장난친 것 마냥, 올라가던 길과는 사뭇 달랐다. 내려오는 길에 들어간 빠에야 집도 무척 친절했는데, 나를 위해 입구에 경사로를 설치해주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크리스마스 저녁을 보내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우리를 반겼다. 하하호호. 



우리는 먹물 빠에야를 시켰다. 풍미가 좋았고, 둘 다 배고팠는지 입과 치아에 검정 소스를 잔뜩 묻힌 채 정신없이 빠에야를 먹었다.

"결혼하자"
"응?"

당황한 나머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되묻는 것 밖에 없었다. 이거 프로포즈인 거지? 얼떨떨했지만 재차 말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갑자기 뭐야~”라고 타박하듯 말했지만, 오늘 같은 하루를 함께 해준 남자친구가 너무 고마워서, 오늘이 마치 지난 우리의 연애이자 앞으로 우리의 삶일 것 같아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가라앉는 분위기가 싫어 반지 없는 프로포즈는 무효라며, 실반지라도 구해와서 다시 하라고 구박했지만 나는 이 날 저녁을 잊을 수 없다. 


하루 동안 긴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는 그저 놀기 좋은 휴일이었는데, 크리스마스란 원래 이런 건가 싶다. 스타벅스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 음료가 나왔다. 코로나 때문에 삭막하지만 곧 결혼할 남자친구와 함께, 올해는 또 어떤 크리스마스를 보낼지 기대된다.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도 잘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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