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들과 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이름은빨강 Oct 19. 2021

면역이 필요해

아이의 관계에 대한 엄마의 자세

코로나 백신 2차 접종 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약한 부위들이 돌아가며 아프기 시작했다. 허리와 팔의 통증이 먼저 온 뒤, 왼쪽 눈 아래쪽에 조그마한 눈 다래끼가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표시가 꽤 나는 채로 2주 넘게 지났다.


바이러스 등 요인은 여러 가지지만 보통 면역이 떨어지면 눈 다래끼가 난다고 알고 있다. 접종 후에는 극도로 피로했다. 거기에 기초적인 몇 가지긴 하지만 새로 운동까지 시작해서 몸의 피로가 해소될 틈 없이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런데 아이도 요즘 많은 일을 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다.


다래끼에 전염성은 없는 걸로 아는데 아이의 왼쪽 눈 윗 꺼풀에도 눈 다래끼가 올라왔다. 함께 손을 잡고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 다녀오는 길은 아침과 다르게 따뜻했다. 전형적인 가을의 오후 햇살과 푸른 하늘, 바람이 시원했고 아이와 손을 잡고 걷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 행복감은 곧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병원 곁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의 쇼윈도에 있는 어린이용 음료수를 마시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집 근처에 가서 사 주겠다고 말한 건 나였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아이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아이 친구에게도 음료수를 사주자는 말도 내가 아이에게 건넸다. 전화로 음료수를 사 가겠다고 하자 아이의 친구가 "여기 OO 형아랑, OO 형도 있어. 그것까지 같이 사와!"


그런데 아이들의 음료수를 사는 동안 이유모를 짜증이 올라왔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카드를 건네면 늘 한 개만 골라오는 우리 아이나 다른 친구들과 달리 과자며 캐러멜까지 사 오는 그 친구의 행동이 떠올라서였을까? 돈이 아까운 건 아니었지만 그런 행동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 친구가 놀고 있는 놀이터에 들러 음료수를 전해주고 우리는 집으로 들어왔다. 아이가 친구들과 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아니고, 제 할 일을 하고 나오겠다고 나를 선뜻 따라나서기까지 했는데 마음속의 어떤 감정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할 일을 마치고 다시 나가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다가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아이의 친구가 평소 보여주는 행동들이 어린 시절 나를 자주 울리던 친구의 어떤 점을 많이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선의와 친절을 이용하고,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을 볼모 삼아 자기에게 유리한 데로 조종하는데 능한 아이였다.


아마 그 친구도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타고난 성향이 자기 위주였고, 수많은 친구들 중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는 내가 점점 쉬워졌을 것이다. 끝내 그것을 잘 거절하지 못한 나에게 그 아이는 결국 아주 경미하지만 일종의 가스 라이팅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몇십 년 뒤 내 아이와 어울리는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하고 만 것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모르게 오랜 나의 문제가 불쑥 튀어나와 현재 우리 사이의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다. 아니 사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지만 아이의 일에 있어 나도 모르게 더 민감해지는 경향이 있다고나 할까? 그럴 때면 평소의 내가 경험과 지식으로 꽁꽁 감춰두었던 오랜 상처와 감정이 엄청난 속도로 소환된다. 아이의 일이 마치 내 일 같고 나의 상처가 마치 아이의 감정 인양 굴고 만다.


아이 앞에 놓여있을 온갖 어려움,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을 다 제거할 수도 없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이가 상처 하나 없이 자라날 수 있을까? 상처는 과연 아프고 의미 없기만 할까? 지난날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그 상처를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나는 그저 피해자로만 그 관계를 이어왔던 것일까? 당시에는 너무 아프고 힘겨워서 덮어두기 급급했던 문제들을 아이를 통해 다시 꺼내어 들여다본다.


나는 그랬지만 아이에게는 상처일지 또 다른 무엇이 될지 이제 막 관계를 시작하고 만들어가며 분명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역할은 불가능한 무균 무질의 예방체계를 만들려고 나와 아이의 관계를 소진하는 아니라 비록 상처를 입더라도 튼튼한 면역을 기를 수 있게 그때그때 곁에서 즉시 도와주는 것일 테다.


지금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우리 자신을 믿는 건강한 면역이 필요한 때다. 다래끼가 난 눈과 몸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도.





매거진의 이전글 운동화 빨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