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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 May 31. 2023

어쩌다 교육을 하게 되었냐고 물으신다면

미래의 나에게 보내두는 자기 설명서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지난달로 소프트웨어 개발 교육이라는 일을 한 지 만으로 2년이 되었습니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에서 쭉 ‘프론트엔드 개발자’라는 이름을 달고 일하다가 처음으로 옮겨온 곳인데요.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 개발을 하다가 왜 교육을 하려고 하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들어와서도 꾸준히 그것도 매년 끊이지 않고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처음 개발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참 많은 질문을 받았었는데, 개발자로 일할 때에는 그나마 받지 않게 되던 질문을 교육자가 되니 주기적으로 다시 받게 되더라고요.

이 글은 하도 많이 받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는 사람은 지금의 저지만, 이 답들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교육이라는 일을 해보기로 결정한 그 해 겨울의 제가 거친 생각의 과정과 그 끝에 내려두었던 답들입니다.



고민의 시작

저는 고민을 정말 많이 하고, 대신 그 수많은 고민을 거쳐서 내린 결정은 후회하지 않는 편입니다. 흡사 걱정 기계와 같이 열심히 걱정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많은 고민을 다시 할 테고 그 끝에는 결국 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아요. 그리고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그게 옳은 선택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이 저 스스로에게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대신 고민이 조금 길어질 때면 미래의 나를 위해 여러 고민의 기록을 조금씩 남겨둡니다. '이 시점의 나는 이런 것들을 이유로 이런 선택을 했다'는 일종의 자기 설명서를 미래의 나에게 보내두는 느낌으로요. 적어둔 조각조각의 설명서는 종종 꺼내 읽어보면서 그때와 어떤 부분이 달라졌고 어떤 부분은 여전히 유효한지를 한 번씩 맞춰보곤 합니다. 이렇게 써놓으니 나름 체계적인 느낌이지만 사실 어떤 때에는 일단 저지른 결정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선 저지름 후 셀프 정리와 설득의 과정이기도 하고요.
개발 교육이라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해 볼지를 고민하던 시점에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일은 무엇이 좋은가, 나는 어떤 걸 기여할 수 있고 반대로 어떤 경험을 얻어갈 수 있나 하는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조각들을 모아보니 이런 긴 글이 되고 말았어요. 한편으론 효율이라곤 없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해야 선택을 하고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어쩌겠나~~~ 하며 살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육이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처음 개발을 배웠던 환경이 제 인생에 꽤 많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개발 교육에 대한 관심은 항상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고백하자면 저는 개발자가 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개발은 배우고 싶었지만 직업적인 개발자로 일할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학부에서는 철학과 미디어 아트를 복수 전공했습니다. 처음 개발을 배우기 시작했던 건 학부에서 배우던 미디어 아트 작업에서 무언가 센서를 반응시키기 위해 개발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는데요. 학교 수업이 자꾸 정원이 초과되거나 반대로 폐강되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어딘가 다른 배움처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떤 기술을 써야 하는지는 알아서 학습해야 하고 바로 다짜고짜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수업의 연속이었는데, 대부분 기획이나 아트웍을 만드는 친구들이 많아 기술적인 부분을 같이 학습하고 고민할 곳이 부족했거든요.


그러다 NHN NEXT라는 교육 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개발이라는 게 어떤 건지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이 까만 창은 뭐야, 터미널이라고?)

이상하고 재밌는 시공간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 코드와 마주할 때면 끊임없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나는 개발이라는 일과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쭈그러들고 있으면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주워서 펼쳐주었고, 과제를 내야 하는데 수없이 터지는 에러 로그들과 마주하며 넋이 나가 있으면 누군가는 새벽까지 같이 고민해 주는 곳. 시답잖은 이야기와 바보같은 질문을 계속 던져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곳.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다름에 대해 특별함이라고 이름 붙여주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다시 고백하자면, 어쩌면 그곳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초보자에게는 그저 지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수많은 좌절들에도 불구하고 속도는 좀 느릴지언정 개발이라는 걸 계속해서 놓지는 않고 학습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함께하는 사람들과 쌓아온 시간들이, 그다음의 시간들을 보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고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결국 지금은 사라져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지만 그 교육 과정의 영향력은 처음의 제 예상보단 크게 남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개발이라는 도구를 배웠고, 사람이 남은 것 같네요. (사실 더 솔직해지자면 무엇을 배웠는지는 가물가물하네요…ㅎ 교수님들 죄송합니다)


당시 저는 대학 전공과 개발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어서 한쪽에는 형이상학이라는 괴상한 철학책을, 다른 한쪽에는 개발책을 두고 공부를 하곤 했었는데요. 형이상학 책도 한 페이지에 한 문장도 이해되지 않고, 내가 짠 코드도 한 줄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날에는 진심으로 내가 멍청이인가 싶은 생각에 울고 싶었습니다. 막막함과 좌절감에 실제로 귀갓길에 울던 나날도 많았고요. 하지만 그리 특별한 의지력을 가진 것도 아닌 제가 그런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결국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개발이라는 걸 계속 공부하고 시도해 보았던 건 NEXT라는 환경 속에서 학습했던 덕이 큰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가장 천천히 배우는 사람으로 손꼽힐 법한 저였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내는 학습과 좌절과 그래도 다시 학습하는 일상,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조금씩이나마 쌓아가는 성취감을 반복하다 보니 몇 년째 일도 하게 되었고요. 제 나름의 최선을 항상 다하기도 했지만,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일도 할 수 있었던 덕에 그 최선을 다할 수 있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개발 교육 기관도 워낙 다양하고 개발자로서의 취업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 개발 교육이라고 하면 ‘몇 %의 취업률을 보장하는 부트캠프’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 것 같지만… 제가 경험했던 개발 교육은 그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개발이라는 도구를 함께 학습하는 재밌는 공동체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물론 결과적으로는 취업 혹은 창업에 대한 것도 같이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수료한 뒤에도 이런 환경과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라면 한 번쯤 해봐도 재밌겠다 싶었고요.



그저 두려워서 망설여지는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경험해 보자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실 여러 문제가 있었어요. 교육이라는 건 해본 적이 없는 일이고, 몇 년간 일을 하긴 했지만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하기엔 스스로 너무 부족한 것 투성이로 느껴진다는 문제가요. 그리고 교육이라는 일이 엔지니어로서의 커리어에서 손해 보는 일은 아닌가? 교육 일을 하다가 엔지니어로 다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여러 걱정도 같이 들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고민하던 저에게 비슷한 걱정잔소리의 말을 하는 주변인들도 있었고요. 결정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를 드러내고 무언가 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자체에 대한 관심은 아마 계속 있을 것 같았고, 시니어가 된 뒤에 시도해 보려면 오히려 더 무서울 것 같았어요. 그때에도 같은 고민을 할 것 같았거든요. 그럴 거라면 관심이 갈 때 그냥 부딪쳐서 경험해 보고 나에게 맞는 일인지 판단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개발' 교육을 하는 일이니까 적어도 내가 교육해야 하는 영역에 한해서만큼은 오히려 프로덕트 개발팀에서 일하는 것보다 학습도 더 쌓아나가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강의가 주가 되는 곳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긴 기간,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사람들끼리 함께 학습하는 공동체에 가까운 곳이라면 어찌저찌 말하기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고… 만약 실제로 이 선택이 일반적인 시선에서는 어떤 부분에서는 손해를 보거나 조금 돌아가는 길이 된다 하더라도,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의 경험이 된다면 충분할 것 같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엔지니어링 래더와 같은 비유와 표현을 접하고, 풍문으로 들려오는 주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막연하게 미리 정의되어 있는 어떤 루트를 따라가며 그에 맞는 기대치를 충족시켜 나가는 것만이 하나의 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이런 프레임워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럴 때면 주문처럼 이런 말들을 꺼내서 읽곤 해요. 올라가기도 하고, 옆으로 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지만 그 각각이 성공이나 실패를 뜻하진 않는 정글짐처럼 커리어를 대하기 위해.

로리가 커리어에 대해 굉장히 멋진 비유를 들었는데, 커리어는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라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일을 시작하게 되면, 기회를 찾으세요. 성장을 찾으세요. 임팩트를 찾으세요. 미션을 찾으세요. 옆으로 움직이고, 내려가기도 하고, 시작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세요.

이력을 쌓지 말고 직무 능력을 쌓으세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준 직함을 평가하지 말고, 여러분이 뭘 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세요. 진짜 일을 하세요.  

- 셰릴 샌드버그 HBS 졸업 연설 중에서



같이 잘하기 위한 환경을 고민하는 일은 재밌으니까

일하면서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같이 성장하기 위한 환경을 고민하는 일들을 할 기회가 있었고, 그 일들은 항상 생각보다 재밌었어요. 직접적인 교육 경험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에서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의 흐름도 있었습니다. 새로 온 누군가를 위한 가이드를 하는 일, 팀에서 필요한 방식의 회고를 고민하기 위해 동료들과 회고위원회를 꾸려서 운영해 가던 일, 마크업 개발을 주로 하던 동료와 스크립트 개발 업무를 페어로 작업하면서 같이 학습해 나가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의 같이 잘해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일들이 있었고 대부분 재밌었어요.(안타깝게도 어렵기도 했지만…ㅎ)


좋은 피드백을 하기 위한 연습, 함께하는 성장을 위한 환경을 세팅해보는 연습, 같이 성장하기 위해 내가 알고 경험한 것들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해서 전달하는 연습같은 것들을 해볼 수 있는 게 교육일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결국 함께하는 사람들이 같이 잘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해 본 경험을 해두는 것은 앞으로 어떤 맥락에서든 도움이 되는 자산으로 남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개발 업무를 계속 한다고 해서 이런 기반이 알아서 쌓일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성장이라는 말의 방대함, 재미라는 말의 모호함

그리고 누구에게든 이 모든 성장의 과정이 스스로를 망가뜨릴 만큼 몰아세우는 과정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성장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너무나 많이 괴롭혔던 사람으로서, 시작하는 단계의 누군가가 가능하면 저와 비슷한 괴로움을 겪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건강한 방식의 성장을 같이 고민해보고 응원해 줄 수 있다면 내가 비록 개발왕은 아니더라도 한 발자국 정도는 먼저 업계에서 일해본 사람으로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사실 가장 컸습니다.


공부하면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개발자로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저는 자주 '내가 진짜 개발자가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 같아요. (그 시간에 공부를 했다면 내가...)

처음 개발을 배울 때는 친구들이 "개발 너무 재미있다"라고 할 때마다 헤매고 끙끙대며 겨우겨우 문제를 해결하던 나를 비교하면서 좌절했고, 그다음엔 ‘헤매는 과정조차도 재미로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하며 나는 개발이랑 안 맞는 건지 고민하고요. 일을 시작한 뒤에도 엄청난 변화가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새롭게 알아야 할 것들은 항상 쏟아졌고, 퇴근 후와 주말에도 계속 하게 되는 스터디에, 언제까지고 성장해야 할 것 같은 막막함과 압박감이 이어졌습니다.

길이길이 보전되어야 할 명언


개발을 공부하는 이들이나 업으로 삼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 ‘성장’과 ‘재미’라는 키워드를 유독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개발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끝없는 고통에 빠뜨린 키워드들이기도 했는데요. 성장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았고, 수많은 QA 이슈들과 마주하면서 밤을 보낼 때면 (설마) 이 와중에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 건가?!하는 고민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에는 항상 ‘성장하기 위해’ 무언가 사부작사부작하는 친구와 동료들이 가득했고, 리더님과 얘기할 때면 요즘 일하는 게 ‘재밌는지’를 물어보시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재미'와 ‘성장’ 역시 각자의 정의를 먼저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요? 성장이라는 것의 범위는 너무나 방대하고, 재미라는 말조차 어떤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지 사실은 굉장히 모호한 것 같아요. 새로운 걸 배우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마치 누워서 예능을 보는 것 같은 즉각적인 재미를 주는 일이 아닌 건 분명하고요.

하지만 그때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마치 예능을 보는 듯한 재미를 느껴야, 혹은 어려움이라곤 크게 느끼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어야 '진짜 개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새로운 걸 해보는 자체가 '재미'이자 '성장'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로 인한 어려움을 견디고 끝에 가서 문제를 풀었을 때의 잠깐의 뿌듯함이 '재미'이고 '성장'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건 생각하지 않던 과거의 저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맘대로 ‘진짜 개발자’ 같은 환상 같은 걸 정해두고 내가 그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개발을 하는 모든 순간을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주말에도 신나서 개발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게 아닌지 등을 따지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닦달했던 것 같아요.


그 탓인지 공부하고 일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불안의 밤을 보냈습니다. 원래의 타고난 성향, 개인적인 문제가 섞이긴 했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써도 만족할 만큼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은 저를 계속해서 따라붙는 괴로움이었어요.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시달리는 와중에도 학습하고 일하는 일상을 반복해서 보내던 끝에 어느 날엔가에는 집에 오는 길에 아무 이유 없이 후드득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고, 어느 날엔가에는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거나, 어느 날부턴가는 말 그대로 태엽이 고장난 인형과 같이 방전된 상태로 있는 게 최선인 상태가 되고 말았어요. 복합적인 많은 상황들과 함께 우울, 불안, 강박의 삼종세트가 점점 심해졌고 결국에는 상담 치료를 비롯한 치료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상을 복구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습니다. 복구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어두운 터널에서 하루하루가 사라지는 것 같은 시간들이요. 그렇게까지 가기 전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만 해내는 연습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때도 지금도 어떻게 성장할 지에 대한 이야기는 넘치게 많았지만, 성장하는 사이사이에 필요하다면 조금씩 정차했다가 가도 된다는 말은 잘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심지어는 회복을 위해 저전력 모드로 살아가는 와중에도 이러다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구석에 남아있었어요. 그것조차 다 지나 보내게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싶다.
성장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괴로울 일이 없었을 것.
→ 하지만 나를 망가뜨리면서 성장하고 싶지는 않다. 내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만 성장해나가도 되지 않을까?
→ 그런데...그렇게 하고 싶다는 성장이란 게 대체 뭐지? 이것부터 다시 찾아가보자.


그리고 나서야 조금씩 내가 원하는 성장의 방향이라는 게 무엇인지, 나는 어떨 때 일의 재미를 느끼는 지를 수집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누군가 저와 비슷한 성향에서 비슷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느라 괴로워하고 있다면 적어도 저보다는 일찍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만 성장하자는 말, 그 어떤 것보다 스스로를 먼저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라는 말, 그리고 과거의 저처럼 비교 속에 갇히거나 ‘개발자라면 모름지기’ 같은 것에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성장과 재미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해 보자는 말을요. 취업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취업 자체만 바라보기보단 그 이후에 더 길게 이어질 일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재능은 누군가를 훨씬 앞선 곳에서 혹은 훨씬 높은 곳에서 출발하게 만드는 듯했다. 재능이 있다면 더 열심히 쓸 참이었다. 만약 없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해볼까 싶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 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십 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남에 대한 감탄과 나에 대한 절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재능에 더 무심한 채로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 <재능과 반복> 중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동료가 될 확률을 높일 수 있다면


서로의 성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것을 공유하려 하는 건 제가 이 업계와 분야를 사랑하는 이유이고, 한편으로 이 업계에 대한 애정을 조금 잃게 만드는 건 때때로 들려오는 개발 업계 내에서의 독성 말투와 진입 장벽을 세우는 말들입니다. 개발 직군과 개발을 도구로 삼지 않는 다른 직군을 흔히 갈라 세우기도 하고, 개발 직군 내에서도 벽을 만들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차별의 말들을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 여러 말들 가운데에서 일을 시작하는 시점의 저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건 ‘개발자’ 자체에 대한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이었는데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진짜 개발자’라는 환상에 시달렸다고 했지만, 사실 거짓말입니다. 실제로 뭐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고 온라인상에 카더라로는 더 많은 것 같아요. 비전공자는 한계가 있다, n년차인데 이런 것도 모르냐, 이런 것에 관심을 안 가지면 개발자로 계속 일하긴 힘들다 등 여하간 ‘진짜 개발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실체 없는 압박, ‘개발자라면 모름지기~’의 다양한 버전은 실제 생활에서도 종종 들었습니다. 이 이상한 프레임은 생각보다 많은 동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기본적으로 같이 지켜야 할 윤리의식이나 직업적인 책임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세상에는 그저 다양한 개발자들이 있는 것이지, 단 하나의 ‘진짜 개발자’ 같은 상은 없을 텐데도요.


개발팀에서 일하더라도 사실 저는 새로운 기술을 발 빠르게 적용해 보거나 극한의 성능 튜닝을 해내는 것, 기술 그 자체를 깊게 파고드는 것 같은 일보다는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명확히 모르던 것을 내 나름의 기준으로 이해해서 동료에게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고 공감대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에 더 뿌듯합니다. 우리가 풀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같이 찾는 과정이 흥미롭고요. 그렇게 해서 서로가 더 비슷한 그림을 그리면서 일을 할 수 있다면 결국은 그 과정 속에서 개발을 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 필요한 방식의 기술적인 성장도 이뤄나갈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발자로서 코드로 팀에 기여하는 것 이상으로 같이 일하는 문화를 고민하는 일에서 보람을 얻습니다. 때로는 가족보다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료들이 이왕이면 행복하게 일했으면 좋겠고, 각자에게 맞는 성장을 해나갈 수 있는 환경 속에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함께 만든 제품이 실제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유용하게 쓰이는 것을 발견하면 또 좋고요.


하지만 저와 다르게 누군가는 정말 기술적인 원리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 동기 부여의 요소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여러 가지 기술을 빠르게 터득해서 활용해 보는 것에 흥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난도 높은 기술 문제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즐거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다양한 제품들을 빠르게 만들어보는 것이 즐거움인 것처럼요. 같은 팀에 있다면 목표의 방향은 맞추어야겠지만, 그걸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는 이런 각자의 다양한 역량들이 잘 조합되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팀이 좋은 팀이 아닐까요?


특정 팀, 특정 환경에서 더 적합한 흥미와 역량이 있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에게 '이런 모습이 되지 않는다면 개발자라고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선을 긋고 위기감을 주는 방식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술 학습이 쉬운 일이라거나, 변화와 성장의 노력을 하지 않고 그대로만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학습의 과정에는 즐거움과 성취감 외에도 시간과 노력과 괴로움이 들기 마련이고 요즘같은 시장 상황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의 미래를 생각한 이야기라면 앞으로 이런 부분을 보완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피드포워드, 그리고 응원을 남겨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냉정한 조언이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거나, 그런 말에서 동기부여를 얻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테고 그런 다정한 소통은 너무 이상적이고 온실 같은 환경에서나 가능하다는 냉소도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에는 다정함과 다양성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고 믿어요. 그리고 개발 직군 내에서뿐 아니라 기술 업계가 좀 더 다양성을 인정하고, 업계의 동료들이 조금쯤 더 친절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도, 자신에게도요. 그리고 그렇지 못한 말과 마주했을 때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적절히 튕겨내면서 자기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교육이라는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작게나마 만들어본다면 이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이들과 함께할 때에도 그곳을 그런 환경으로 만들어가주지 않을까요?


아주 작은 응원과 믿음의 한 마디라도,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입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는다' 중에서


사람은 때로 한없이 복잡하고, 또 한편으로는 정말 단순하기도 한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이 때로는 누군가 단 한 사람의 진실된 믿음, 어떠한 말 한 마디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 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그래왔기 때문에요.


근거 없이 제 가능성을 꺾는 말을 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나도 잘 생각해보지 않은 내 장점을 찾아 짚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한켠에는 '어디 가서 뭘 하든 잘 할 것'이라고 그저 진심 가득한 응원의 말을 남겨주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붙들고 끙끙대다 결국 SOS를 치고 주눅들어 있던 날에는 '도움을 잘 요청해줘서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선배가 있었고요. 그 외에도 아마 그 말을 한 당사자들은 기억도 못하지 않을까 싶은 극히 일상적인 대화에서의 어느 한 마디가 뜬금없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어느 때에는 나보다도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의 그 신뢰가 해내고 싶은 의지를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좌충우돌을 겪으며 천천히 조금씩 나아가던 시간들 속에서 많은 친구, 선배, 어른들이 그런 식으로 지켜봐주고, 같이 고민해주고, 한 마디씩 응원과 믿음의 말을 남겨주며 기다려주고 함께 해준(저를 견뎌 준) 덕에 지금의 제가 그나마 안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나 싶어요. 어쩌면 한때 나에게 필요했던 말을 다시 그 말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게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요.



그리고 질문받는 선택을 한다는 것

돌이켜보면 질문을 많이 받는 선택을 하는 게 그 질문들에 답해가는 과정 속에서 때로 나한테 훨씬 더 선명한 선택이 되곤 하더라고요. 개발을 처음 공부하려고 했을 때에도 개발 교육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에도 생각보다 정말 다양한 질문들을 받았어요. 호의와 궁금증에서 비롯된 질문들,  제가 후회할 선택을 하고 있다는 잔소리를 하기 위한 빌드업의 질문들. 그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를 언어화해야 했고 내가 이 선택을 하는 이유에 대해 설득과 다짐의 시간을 원치 않아도 여러 번 거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수많은 생각의 흐름을 지나쳐 이곳에 오면서 닉네임을 ‘공원’으로 지었습니다. ‘playground를 만드는 사람’의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직역하면 사실 ‘놀이터’지만 그래도 이름인데…놀이터! 라고 불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교육이라는 게 실패하지 않는 최단 루트를 알려주는 곳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선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자기만의 실패를 해도 문제없는 시도의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면 내가 조금쯤 기여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런 환경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경험을 쌓아갈 수 있겠다. 그런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이름을 짓고 우당탕탕 교육을 시작하고, 그 뒤로 2년의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한 기수를 경험해 본 뒤에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방향을 나름대로 아이폰 홈 화면에 적어두기도 했고요. 초보 교육자로서 재밌던 날도, 뿌듯했던 날도, 때로는 버거웠던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이 지침들을 잊지는 않으려 애썼습니다.

학생들을 '크루'라고 부르고 있어요


몇 번의 사이클을 돌면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교육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 속에서 서로 언제든 이야기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피드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크루들은 언제나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 헤쳐나가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경험해 온 것을 그저 레퍼런스의 하나로 줄 뿐, 크루들이 자기만의 가이드를 만들어가는 것을 기다려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 되어 돋보이길 목표로 삼기보다 누군가에게 함께 하고 싶은 동료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실패 없는 사람이 되자고 말하기보단 충분히 실패해 보아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잘 되어가고 있는지는 또 다른 기회에 돌아보아야겠네요. 일단은 그러기 위해 필요한 오늘 하루의 일들을 또 해나가야겠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많은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고민과 시도의 시간을 쌓아가다 보면 또 어딘가에 닿을 수 있겠죠.


https://www.youtube.com/watch?v=Cj_S9oAKU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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