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상심이 꽤 높은 편이다. 이왕 뭔가 하는 거, 가능하면 조금씩 더 나아지고 싶다. 개인적인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에너지 레벨은 높지 않다. 주변 환경에 민감한 편인 데다 이런저런 걱정을 달고 사는 탓에 에너지가 이상한 곳에서 새는 때가 많다.
이렇게 작고 소중한 에너지 저장고에서 하루하루의 에너지를 꺼내어 쓰면서 내가 바라는 만큼의 성장을 이루고 싶어 할 때면 자주 늪에 빠지곤 했다. 이름을 붙여보자면 비교와 자존의 늪이라 하겠다.
세상에는 애초에 이런 늪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본인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도 있긴 하던데,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숱하게 늪에 빠졌다가 건져내졌다가, 다시 빠졌다가, 또다시 빠져나오기를 반복한 끝에 이제는 그래도 어떻게 이 늪을 건너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에게 맞는 방법을 조금은 알겠다. 하지만 언제 또 함정에 빠져서 이 늪에 다시 오게 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한 지침들을 정리해두려 한다.
늪에 빠지는 시작은 흔히 모든 걸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일 때다. 이분법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성공 아니면 실패다. 그리고 100%를 달성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실패로 규정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때로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망했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혹은 실수를 한 날 나를 향해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들도 있다.
’어휴, 멍청이인가?‘
생각보다 소소한 일상의 하루에서조차 그러기도 했다. 무언가가 예상보다 잘 되지 않으면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히든 포텐셜>에 이 상태를 아주 잘 표현해주는 그림이 나온다.
두꺼운 기술책 하나를 붙들고, 목차 순서대로 공부하려 했던 적이 있다. 목표는 거창했다. 'ㅇㅇ책 마스터하기!'. 그리고 당연히 그 책을 마스터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하나의 책을 마스터한다는 게 무슨 목표였을까? 아무리 책을 읽어도 내가 그 기술을 마스터했다는 성취감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매일의 실패가 찾아왔을 뿐이었다. 오늘 야심차게 3개 챕터를 읽고 나만의 언어로 정리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하루를 시작하지만, 1개 챕터를 겨우 이해하고 끝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책을 공부하는 기간 내내 하루에 목표했던 양을 다 채우는 날은 많지 않았고, 매일 나는 목표했던 공부량을 채우는 데 '실패한' 나를 자책했다. 다음 날에는 더 빡세게 해서 어제 못한 분량을 채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기 마련이었다. 전날 못한 걸 다음날 갑자기 두 배의 속도로 이해하게 되었을 리가 없으니 그날도 실패였다.
발표를 해야 했던 어느 때에는 하나의 실수에 괴로워했던 날도 있다. 발표할 때 말로 추가 설명하려고 했던 포인트들을 정리해서 연습도 여러 번 했는데, 긴장한 채로 발표하다 보니 그중 두어 개 정도를 빼먹은 걸 깨달았던 날이었다. 열심히 연습했던 발표를 망쳤다는 생각에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중요한 내용들은 전달이 되었지만, 그때는 빼먹은 내용들에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이 외에도 많은 순간들에 내 세상은 '해냈다!'와 '실패야...' 사이만을 오가곤 했다. 물론 '해냈다!'의 순간은 아주 드물었고, 나는 계속해서 '뭔가를 계속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성취감은 들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동료에게, 선배에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나보다 이런 고민을 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생각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는 것 같은 책들을 이것저것 찾아 읽어보기도 했다. 이야기를 수집하다보니 공통된 점들이 보였다. 생각보다 모두의 세계가 나처럼 '여기까지 못하면 다 실패!'라는 식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실패야...'와 '해냈다!' 사이에는 사실 수많은 사이 지점들이 있었다.
두꺼운 책을 붙들고 공부하는 것에도 중간 단계의 성취가 있고, 발표는 실수가 있긴 했지만 의도대로 잘 흘러간 부분도 많았다. 책의 특정 부분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떤 부분은 나름대로 설명해 낼 수 있었고, 하루에 몇 개의 챕터를 다 하지 못하는 '나'를 탓할 게 아니라 '내가 학습하는 방법'에 일부 수정이 필요했던 일이기도 했다. 발표에서 의도대로 전달이 잘 된 부분들은 스스로 칭찬도 해주고, 아쉬웠던 부분은 다음 발표할 때엔 반복되지 않게 할 방법을 고민해보면 될 일이었다.
사람들이 겪는 흔한 인지 왜곡과 그 인지 왜곡을 줄이기 위해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들을 다루고 있는 책인 <필링 그레이트>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인지 왜곡 중 하나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 방식을 다룬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All-or-Nothing Thinking) - 사물을 절대적인 것, 흑과 백의 범주로 나누어 회색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완벽하게 성공하거나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여긴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면 삶이 매우 비참해질 수 있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 무가치한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흑과 백의 범주로는 우리 자신도, 세상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세상에 완전히 끔찍하기만 하거나 절대 무결하기만 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실수를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이분법의 세계를 강화하는 것 역시 인지 왜곡의 사례로 등장한다.
낙인찍기(Labeling) - 낙인찍기는 한 단어의 낙인에 자신이나 타인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지나친 일반화의 극단적 형태다. 예를 들어, 실수하면 "실수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을 '멍청이'나 '패배자'라고 부르는 식이다. (...) 낙인찍기는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우리가 실제로 실수했다고 추정하고 그 실수를 정확히 짚어내 그로부터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얻는 대신,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만 곰곰이 되씹게 만들기 때문이다. (...) 사람은 한 가지의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낙인에 담아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세상에 '멍청이'나 '패배자'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멍청한 행동이 존재할 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잘' 하려고 노력해도 종종 '멍청한' 짓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 실수를 한 사람일 뿐이지 '실패자'가 아니고, 70% 정도로 무언가 해냈을 때에는 70의 성취를 인정해주고 나머지를 더 채울 지에 대해 궁리해보면 될 일이었던 거다. 아마 그때의 나는 잘 하는 사람이라면 나같은 중간 단계의 성취가 아니라 한번에 100을 다 채우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 많은 삽질을 했던 것도 같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자동으로 떠오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내 인생의 편집자가 되어서 한 단계 편집을 거칠 순 있다. 과거의 나, 미래의 나를 포함해 0과 1의 이분법 세상에 갇혀서 스스로를 못살게 굴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 지침들과 함께 같이 스펙트럼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길
일단 인지하는 데에서 시작하기. 지금 내 고민이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것은 아닌지 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스펙트럼 사고로 바꿀 수 있는 지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목표 달성률은 했다/못했다 가 아니라 몇 % 했다, 혹은 총 몇 개의 할 일 중 몇 개를 했다 같은 식으로 바꾸어 생각해본다.
모든 것에서 100%가 되지 않아도 괜찮음을 받아들인다. 이걸 받아들인다고 해서. '전무'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